현존의 언어
한동일의 <라틴어 인생 문장>이라는 책을 옆에 두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봅니다. '노년은 그 자체로 병이다.' 테렌티우스의 <아페르의 희곡>이라는 책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한 대목을 읽다가 생각에 잠깁니다. 어떤 병에 걸렸다는 것일까? 젊음에로의 회귀하고픈 향수병을 이름일까? 쓸데없는 근심 걱정이 늘어나는 마음의 병을 이름일까? 어떤 기준이냐에 따라 이 말은 일견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처럼 보입니다. 노년을 언제로부터 상정해야하는지조차 애매합니다. 정말이지 '노년'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제각각이라 그 구분선도 지극히 주관적인 건 아닐까 싶어집니다. '지공거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노인)'로 공식적 노인 명명을 받는 게 비관적이라고 코칭을 받는 분도 있었어요. 이처럼 스스로 나이듦에 대해 절망적으로 생각하고 삶에의 의지를 놓치는 이가 있는가하면, 여전히 활기차게 하루를 창조하듯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이듦에 대해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을 봅니다. 모순적이게도 사회적 신분이 높았거나 웬만한 영화를 누린 분들 중에 상실감으로 힘들어하는 사례가 잦더군요. 자신이 더 이상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데에서 상실과 좌절로 무기력을 느낍니다. 치열하게 일하던 시간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여유로운 시간에 당황합니다. 큰 일, 바깥일을 하느라 일상의 언어를 몸으로 익히지 못했지요. 스마트폰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불편감을 느끼고, 기관이나 은행 업무같은 간단한 일에조차 미숙한 자신을 발견하고 무너집니다. 아래사람에게 지시해서 해결하던 모든 일들을 스스로 처리해야하는 일이 겁이 나기만 합니다. 키오스크 앞에서 얼어붙어 있는 이들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자연히 잘 나가던 그때가 그립고, 혹시라도 존재감이 지워질까봐 '나는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다'를 인지시키느라 수시로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합니다.
그런데 '라떼는 말이야~'조차 말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에 겪은 일들이 너무 엄청나서 과거의 망령에 속박된 채 벗어나지 못하는 가여운 이들입니다. 하고 있는 일에 실패하거나 성장과정에서 학대를 받고 관계 안에서 소외되어 고립감에 오래 놓여 있었던 이들이지요. 깊은 좌절을 겪으며 자존감이 무너져 내린 사람들은 과거를 잊는 일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여전히 자책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저 역시 깊은 절망감에 빠졌던 7년 전의 사건만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상대에 대한 원망보다 스스로에 대한 극혐으로 생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일이 있습니다. '과거'라는 깊은 동굴을 빠져나오는데 근 5~6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회피하려하면 할수록 악착같이 달라붙어 괴롭혀대더랍니다. 다시는 일어서지도 못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과거는 다른 용도로 씁니다.
열거한 두 가지 이야기는 다 '과거'형 위주로 사고하는 사람들의 폐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나간 시간 속의 내 행적이나 자취가 과거의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역사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하면 과거란 지날 과(過), 갈 거(去)로 합성되어 지나가버린 것이죠. 이미 지나가버리고 더 이상은 없는 거지요. 우리는 기억을 통해서만 인지할 뿐. 과거라는 시제 자체는 성립할 수 없어요. 그 차원에서 미래 역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으로 체감하기 어렵구요. 미래라 생각했던 그 순간도 어느새 흘러가버려서 오로지 기억만이 존재합니다. 결국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현존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현자들의 끊임없이 '깨어있으라'를 강조하는 이유이지요. 들숨과 날숨 수없이 현재를 들이고 내보내는 이것만이 영원합니다. 그래서 코치들은 끊임없이 고객에게 묻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느낍니까?"라고.
과거의 찬란했던 경험을 그리워하며 과거에 묶여있는 것이나, 과거의 고통에 사로잡혀 한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되새김질 하는 것이나 모두 있지도 않은 실체에 매달려 목을 매고 있는 것이니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코치도 묻습니다. "과거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어린 시절에 꿈꾸었던 것은 무엇인가요?","한 가지 영원히 붙잡고 싶은 기억은 뭘까요?", "어떤 성공의 경험이 있나요?","과거에 겪은 뼈아픈 실패 사례는 어떤 것이 있나요?"등등. 그러나 이 질문으로 끝나버린다면 다른 대화나 다를 바가 없겠지요. 코치는 다음 질문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지금 이 문제를 본다면 어떤 느낌인가요?","어린 고객님이 지금의 고객님을 보고 뭐라고 말할까요?",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던 그 기억이 지금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성공을 했을 때 어떤 강점이 발휘된 걸까요?", "뼈아픈 실패 사례가 가져다준 교훈은 무엇이었나요? 그 교훈을 지금과 연결하면 어떤 의미일까요?"
코치는 단순히 고객의 과거에 일어난 일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런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지금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어떤 관점이나 자원이 필요하길래 과거의 사실을 언급하고 기억하는지를 묻습니다. 코치들은 원하는 바가 있는 고객들을 변화와 성장으로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함께 해야 하는 사람들이니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게 지금에 있어서 어떤 의미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둡니다. 고객은 성장을 원하니까요. 영광이 되었건 치욕이 되었건 과거에 매몰된 채 동굴 속에 숨으려는 고객을 툭 쳐줍니다. 지금 스스로 토굴을 파고 있는 그곳은 있어야 할 곳이 맞느냐고? 한줄기 빛이 되는 언어는 과거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 늘 새롭게 열리고 새롭게 창조하는 이 순간에 있지요. 지금만이 영원하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더더욱 자유롭고 행복해지지요.
과거를 잘 흘려보내고 내가 지금 있는 꽃자리에서 다음 순간 이루어지길 바라는 그것을 하고 있는 나. 오지 않은 미래지만 이미 현존해서 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과거와 대척점에 있는 시제는 '지금미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객님은 미래를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가요?","3년 후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이제부터 고객님이 가장 자랑스러워할 것은 뭐가 될까요?","무엇을 보면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고객님의 후세들에게 남기고 싶은 유산은 무엇인가요?","이 세상을 떠나는 날, 고객님을 가장 잘 표현한 비문은 어떤 문장이 될까요?","구체적으로 그려보는 오지 않은 날들에 대해 지금 어떻게 느껴지나요?",고객님의 삶 마지막에 '나는 다 이루었다'라 말하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차이가 느껴지나요? 미래의 일을 묻고 있는데 지금과 자연히 연결되고 지금 뭘 해야할지가 생각나지는 않나요?
코치의 언어는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언어로 있습니다. 고객이 지나간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주의를 빼앗겨 눈팔이 할 때,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느냐고, 지금 이 순간, 당신과 함께 춤을 추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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