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과 5월을 통과하는 시간이 편하지 않다. 1년여 비교적 평안한 상태가 지속된다 싶었다. 4월에 접어들며 몸이 기억하는 시간이 조금씩 신음 소리를 토하고 있었다. 엄마의 주거 공간 추모원에서 관리 연장 고지서가 날아 왔다. 10년이구나. 엄마 돌아가신 지 10년 인데 봄앓이는 여전하다. 돌아가시기 전 몇 개월, 너무도 낯선 모습으로 전쟁을 치른 엄마. 일생 누구에게 눈 한 번 흘겨본 일 없던 엄마가 못된 팥쥐 엄마처럼 나를 들들 볶아댔다.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못된 딸이었던지를 알았다. 엄마는 평생 당했음직한 오욕을 되갚아주기라도 하려는 듯, 전투력을 보이셨다. 그리도 곱고 환하던 엄마가 보여준 최초이자 최후의 반란이었다. 무방비상태로 당해야 했던 그때는 힘들고 괴로워서 엄마도 밉고 형제들도 원망스러웠다. 지금은 외려 그마저도 엄마가 내게 보여준 최대의 배려이자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오래도록 죄책감에 시달리고 한참을 방황했을 수도 있다. 엄마는 내게 면죄부를 주려고 일부러 고약을 떨었을 거라고 믿는다.
절절한 자식 사랑이 유난해서 온 동네 사람들이 외려 자식들 버려놓는다고 걱정할 정도였다. 복에 겨운 나는 종종 선을 넘었다. 어느 순간 소녀 가장이 되어 가계를 책임진다는 유세를 떨었다. 때로는 엄마를 함부로 대하며 모멸감을 주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엄마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얻는 거여서 당당해도 됐는데 늘 죄인처럼 굴었다. 돈 벌러 다닌다고 손 하나 까딱 않고 엄마를 시녀 부리듯 했으니. 하지만 엄마는 자식에게 기대어 삶을 연명한다는 굴욕보다는 사랑하는 딸 뒷바라지를 할 만큼의 건강이 주어지는 것에 감사하고, 손자 사랑을 듬뿍 전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작정하셨다. 우리 아들이 좋은 품성을 가졌다면 온전히 엄마가 쏟은 사랑 덕분이고, 아들이 불손하거나 건방을 떠는 순간을 만난다면 이는 모두 내 탓일게다. 알츠 하이머와 심부전, 신부전 등을 마지막 병명을 달았으나 실은 ‘심리적 고립’이 엄마를 딴세상으로 인도했던 건 아닐지 싶기도 하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고 표현했거만 나는 내내 밖으로 돌며 외연만 넓히며 엄마에게 무심했다.
엄마와의 관계 역학에서 나는 언제나 완패였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나를 사랑할 수 있나 싶을만치 최선을 다하셨다. 혼란과 미망에서 정신이 돌아온 어느 순간 엄마는 측은한 눈길을 보내며 “내가 죽고 나면 네가 망할 텐데 어쩌냐?”라셨다. 엄마의 직관은 틀리지 않았다. 내리 10년을 곤두박질치며 바닥까지 갔다. 경제적 궁핍 상태를 실감해보지 않았다가 장기적으로 이어지는 침체가 지겹고 또 지쳐갔다. 두 달 전쯤이었나 역학을 아는 지인에게서 ‘가족 중 고인이 된 사람이 특히 관계가 좋았다면 꽤 오래도록 침체기를 걷는다고 했다. 10년이 지나면 괜찮아질 테니 조금 더 견디라고 당부했다. 그래서였나? 근거까지는 알 수 없어도 묘한 위안이 되었다. ’얼추 10년이 되어가겠지, 그럼 멀지 않았겠네. 이제 엄마 나 좀 도와줘라.‘ 마치 엄마가 내 삶을 가로막고 있기라도 하듯 나도 모르게 억지를 부리며 원망 아닌 원망을 뱉었다. 그럴 즈음 추모원의 고지서를 받았으니 일순 반가웠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안위에 포커싱을 하고 있는 내 꼴이 또 못마땅하고 부끄러워진다. 이런 심경들이 얽혀 마음이 편칠 못했다.
원현정 의 죽음학 에세이 #마지막까지우아하게 가 자연스레 손에 잡혔다. 천천히 ’죽음‘의 발자국을 따르면서 위안을 얻었다. 저자는 나와 동갑, 친정어머니 나이도 같다. 나처럼 코치이기도 하다. 친한 동생의 지인이기도 한 인연으로 만난 적도 있어 책 읽기가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상실과 애도에 관한 다정한 처방전‘이라는 부제처럼 작가는 다정했다. ’죽음‘이라는 공포를 무조건적으로 차단하고 뒷걸음질 치지 않도록 살살 이야기를 건넨다. 그가 말하는 중심 주제는 나도 늘상 굳혀가던 죽음관이어서 많은 부분에서 동감이 일어났다. 자상하던 아버지의 죽음, 여전히 알 수 없는 동생의 자살, 혼란스러운 엄마의 죽음. 그를 둘러싼 가족의 죽음이라는 사건들은 그를 ’죽음학‘으로 이끌었다. ’우아한 마지막 장면‘ 하나를 건지려고 해석불가의 영역을 깊이 탐구하고 나눈다. 죽음 워크숍을 열기도 하고, “내가 네 뒤에 있어. 나는 네 편이야, 너를 응원할게.’ 라는 콘셉트를 담은 회사 ‘집:gyp’을 통해 ”I got your back’을 외친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순간을 그리고 프린팅해 보내는 맞춤형 주문 제작을 한다.
‘우아하다’는 말을 사랑하는 작가의 일관된 메시지에 적극 동의가 된다. 죽음교육지도사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워크숍 진행 중에 만나는 참여자들의 삶을 경험하면서 그가 그려가는 ‘마지막이 우아한 죽음’ 그림은 완성되어가는 느낌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말러 교향곡 9번 4악장’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랑하는 아들이 임종을 지키고, 옅은 미소로 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나눈다. 나도 비슷한 장면을 이미지화하고 있다. 나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OP.66,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혹은 그노시엔느가 흘렀으면 좋겠다. 홀로 죽음을 맞더라도 내가 선곡한 곡들과 함께라면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을 테다. 이 선율을 배경 삼아, 고요한 침묵만이 내 삶의 마지막 무대에 올라 존재의 춤을 춘다면 참 좋겠다. 덕분에 살아낸 내 삶의 벗들과는 ‘존중과 환대의 식탁’에 초대해 가만한 축제를 벌이고 싶다. ‘그대들 덕에 과분한 삶을 살았고 안전한 사랑 안에서 잘 놀 수 있었다’고 우정과 사랑에 깊이 감사를 드려야지.‘사전 장례식’이라는 이름이 어울리겠지.
사진출처 : 캐나다 이익성 페친
언제 죽어도 좋을 삶을 살아냈다. ‘장기기증’도 진작에 등록했었고, 가급적 어떤 흔적도 안 남기고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풍장, 조장을 하려면 히말라야나 가야 가능하고, 좀 더 능동적으로 죽는 때를 결정하는 데도 스위스를 가야 된다. 우아하게 죽는 일의 절대적 장애가 ‘경비’와 ‘이동력’이겠다. 내 삶의 주기 상으로도 후세들을 생각해서도 울 엄마가 돌아가신 85세를 기준으로 죽음선택권이 주어지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왔다. 차선 대선에서 이 ‘죽음’ 관련 현실적 방안을 생각하는 후보가 있다면 적극 지지할듯 하다. 이런 담론이 터부시되거나 도외시되지 않기를 작가가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식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추모관을 짓기 위한 계획안이 나올 때마다 혐오시설로 분류하고 땅값 떨어지는 걱정을 앞세운다. 지금의 의식으로는 어림 반푼도 없는 담론이겠지만 더 좋은 현실적 대안이 있었으면 좋겠다. 대안이 없다면 그나마 수목장이 환경도 가꾸는 밑거름이 되겠지?
사진출처 : 캐나다 이익성 페친
작가의 시선을 쫓다보니 저절로 셀프 죽음 워크숍을 하고 있다. 작가의 상실을 더불어 애도하려고 나도 말러의 9번 교향곡을 흘러가게 두고 나의 사색창을 열었다. 나와 비슷한 상실을 맛보고 진정한 ‘애도’가 무엇일지 탐색하는 도반. 작가가 죽음학 공부를 시작할 즈음, 나 역시 수강 신청서를 썼다가 포기했다.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했는데, 내 삶이 제대로 엉켜 있어서 최소한의 생존이 다급했다. 그 결과 한 사람은 죽음교육지도사 겸 작가가 되어 있고, 한 사람은 덕분에 셀프 워크숍을 하면서 ‘죽음’을 잘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함께 공부하는 도반이었으면 꽤나 잘 통했지 싶다. ‘결국 웰다잉과 웰빙은 같은 말인 것 같다.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하니까.’- 197쪽. 우리는 모두 ‘그린 마일(사형수가 사형 집행지까지 가는 녹색 복도)’에 서 있다. 노년을 향해 가는 삶은 여전히 청춘만 동경할 것이 아니라, 케렌시아(투우사와의 마지막 결전을 앞둔 소가 잠시 쉬는 절대적 피난처이자 안식처)‘에 머물면서 아름다운 이별, 우아한 죽음에 대해 밑그림을 잘 그리기도 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