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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Aug 05. 2024

코치의 코나투스

100번째 책을 출간하는 사람의 코나투스

100권째 책 출간회 파티에 초대받아 갔다. 작가가 아니면서 책 100권을 쓴다는 일이 일반적이지 않다. 단연 화제성의 모임이었다. 호텔에서 열린 탓에 마치 정치인의 후원회처럼 요란해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식사비 같은 회비조차 걷지 않고 오늘이 있게끔 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저자의 삶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분이 130여 명이 넘는 하객들을 위한 식비를 후원했다. 하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사함을 담아 책 구매를 위한 행렬을 이어갔다. 당장에 3,000부가 예약되었고, 그 중 1,000부는 기부용으로 준비했다.



일반적이지 않은 퍼포먼스도 신선했고, 저자의 인간관계가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사자의 스승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함께 손님맞이를 하고 기뻐하시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두 스승님들이 축사 중 들려준 정감어린 말씀들은 모두에게 감동을 안겼다. 그들은 가난 때문에 용접공으로서의 삶에 머물 뻔했던 한 청년의 분투를 지켜보셨다. 스승들은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졸업할 즈음에는 미국의 친분이 있는 학교에 절절한 추천사로 청년의 학비와 기본 생활비를 보장받게 하셨다. 



조실부모, 의지가지 하나 없던 청년의 눈앞에 새벽 미명이 희망으로 물든 순간이리라. 두 스승님은 평생 그의 멘토로서 길잡이가 되셨다. 환갑이 넘은 제자를 흐뭇함으로 바라보며 “아니, 얘가....쟤가......”라며 에피소드를 풀어내는데 차르르 눈물이 어렸다. 타국에서 낯선 언어로 낯선 개념어를 써가던 그 청년은 자기 언어를 발명하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일생이론‘을 세워 갔다. 일년 365일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고 자신의 내일을 그려갔다. 생존해야 해서 시작되었던 새벽 루틴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근력이 되었고 홀로력을 기르는 루틴이 되었다. 



성공적인 유학 생활 후 대학교와 대기업을 거쳐 다시 모교로 돌아왔다. 교육자로서의 길을 걷겠다는 목적을 세웠다. 학비로 고통받는 제자들의 학비를 알게 모르게 지원하기도 했다. 100권의 저술은 평생을 이어온 새벽 루틴의 결실이었다. 사람은 누구라도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상향성의 의지를 가진 존재다. 이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알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도 같은 결괏값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뭘까?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코나투스‘라는 개념이 나온다. 이 개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Konatus는 ’노력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동사 Conar에서 파생되었다.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같은 철학자들도 사유하였다. 데카르트는 물체가 운동성을 가지든 않든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 같은 경향으로 봤다. 결국 물체의 응집이나 저항을 설명하는 힘을 말한다. 라이프니츠는 물체가 운동하려는 현상으로도 보고, 형이상학적 개념인 본질의 실존 경향으로도 이야기한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양태의 본질로서 실존이 주어진 다음에 그 실존을 지속하려는 노력이라고 여겼다. 단순히 힘으로서의 물리적인 노력만이 아니라, 한 개인 혹은 개체가 실존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근원적 욕망이자 에너지를 말한다. 자기보존을 향한 필연적이고 본성적 욕망의 에너지라니? 비장함이 장착된 언어처럼 느껴진다. 100권째 책의 제목을 『코나투스』로 명명한 이의 정체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 시작은 생존을 위한 공부였지만, 축적의 시간 동안 고유한 일생이론을 탄생시켰다. 삶의 주도권을 지켜낸 이의 당당함을 담고 있다.



차곡차곡 이뤄간 작은 성취와 성과는 ’자기신뢰‘로 이어지고, 크고 작은 성공 경험을 쌓아가며 ’자기확신‘에 이른 것일 테다. 머리를 키우는 데 그치지 않고 경험을 통한 ’몸성‘을 충실히 채웠으리라. ’자기돌봄‘을 넘어 ’자기사랑‘으로 이어간 이의 뿌리는 넓고도 깊어 바람에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 외려 바람이 불면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는 기회로 삼는다. 끝없는 도전을 하면서 고유한 일생이론, 코나투스의 크기를 키워갔다. 더 이상 타인과 비교하고 타인의 욕망을 좇을 일 없는 자유로운 상태.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낯섦을 초대한다.



노력을 기울이기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의 욕망을 좇는지 먼저 알아차릴 일이다. 일인칭의 주인된 삶으로 ’나‘를 이야기하고 있는지, 이상향을 추종하는 삼인칭 ’그‘의 욕망을 말하고 있는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나도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의 혼란으로 그저 세월에 떠밀려 왔다. 55세, 깊은 수렁에 빠진 이후에야 ’나‘의 일인칭 스토리를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나‘로서 살고 싶어졌다. 타인을 의식한 ’책임감‘이라는 멍에를 벗고 나를 들여다보고 관찰하며 말걸기를 시도했다. ’Authentic-Self’를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할까? 근원적인 질문으로부터 나는 나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이때의 대화는 ’자기돌봄‘으로 대변되는 직면이자 만남이고 협상이자 포용이었다. 타인이 평가하고 재단해준 나는 선명한데, 내가 그리는 나는 흐리멍텅했다. 타인들이 그려준 내 모습에서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을 지워나갔다. 나를 잘못 알고 있는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연기하는 삶을 살았음을 발견했다. 축소와 과장, 생략과 비약, 은폐와 왜곡 등 곳곳에서 극히 일부분이었을 ’자아‘가 판을 휘젓고 다녔었다. 



속 넓은 사람처럼 보이게 했고, 있는 사람처럼 느끼게 했고, 아는 사람처럼도 보이게끔 허세를 떨었다. 지향이 곧 나인 양 헛갈리게 했다. 이상적인 기준점을 세워두고 내가 스스로 나를 왜곡했다. 보잘것없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왜곡형 거울은 편의에 따라서 홀쭉하게도, 넓적하게도 흐물흐물 능글능글 꼴을 바꿨다. 그러지 말라고 다정하게 속삭여줬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너의 내면이 부대끼지 않도록 ’일치성‘에만 집중해보자고 달랬다. 내 감정이 드러내는 일, 마음이 시키는 일, 감각이 반응하는 일, 생각이 만들어가는 지도를 가만히 따랐다.



내면으로의 다정한 인사는 힘이 쎘다. 기다렸다는 듯 내면의 병든 ’자아‘는 설명을 하고 변명을 하고 해명을 했다. 듣는 나는 때로는 울었으며, 때로는 웃었다. 아프다가 따듯하다가 슬프다가 서글펐다. 그런 중에 깨달아갔다. 스스로 듣고 관찰하고 알아차리며 발견하는 과정이 진정한 위로이자 치유임을. 충분히 내면의 대화가 이루어진 후에, 나를 허용하고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이 ’자기돌봄‘이자 ’자기배려‘라는 것을. 나를 먼저 돌보고 나야 타인을 돌볼 힘이 생겨났다. ’자기사랑‘을 경험하고서야 타인을 맞이하고 사랑할 공간을 분양할 수 있었다.



코칭으로 만나는 고객들도 다르지 않았다. 타인으로부터 구하던 인정이나 사랑을 자기 내부로 돌리자 단단해져갔다. 타인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사랑스러운 자신을 잘 돌보고 싶어서 삶의 목적을 세우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좀 더 떳떳한 사람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싶어서 아주 작은 목표를 세워가기 시작했다. 고유한 자신의 코나투스로 대학원엘 진학하거나 전문 자격 시험에 도전했다. 운동으로 명상으로...... 나도 남들처럼 미래를 꿈꾸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Authentic-Self’를 찾아가는 이들을 지원하는 코치로서 삶과 일이 통합되도록.



<나-나 말걸기>

Q. 나는 나에게 진실한가? 

Q. 나는 고유한 나의 일생이론이 있는가?

Q. 나는 나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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