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은 흡사 버스를 타고 가는 것과 유사하다. 중간 중간 여러 경유지에 멈추게 되지만 결국에는 종점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은 바로,
’죽음‘일 수밖에 없다.
어느 누가 이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시시각각 우리를 태운 버스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예전에 읽은 시 하나가 아직도 잊히지 않고 떠오른다.
<전략>...광부가 되려는 한 남자와 간호원인 한 여자가 독일로 흘러들어 사랑하고 결혼하였다. 그 부부는 채소가게로 성업 이루자 새로 사 벤츠를 타고 첫 여행을 떠났는데, 그 여행길에서 교통사고로 일가가 나란히 세상을 떴다. 위암말기 환자였던 나의 형제는 병실 창밖으로 몰려오는 봄을 바라보다 평화롭게 눈을 감았고, 화장터에서 유족이 된 나는 점화버튼을 눌렀다. 조문오지 못한 그의 애인이나 다름없던 기막힌 친구는 전방에서 눈사태에 죽어가는 동료 살리려다 눈에 묻혀 죽었다고 한다.
<중략> ... 아, 살아있는 자들이여. 과연 누가 더 잘 죽어가고 계신지.
<학살의 일부 – 누가 더 잘 죽었는가> (김소연)
이렇게 사람을 가리지 않고 소리 없이 다가오는 냉혹한 죽음에서, 재난영화 <엑시트>가 생각난다. 영화에서는 재난의 소재가 자연이 아닌 바로 사람이 만들어낸 ’가스‘이다. 유독성 가스가 도심 한복판에 퍼지는데 이 가스에 접촉한 사람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처음엔 갑자기 나타난 연기를 사진으로 찍으면서 신기해 하다가,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지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게 된다. 영화는 차오르는 죽음의 가스를 피해 좀 더 높은 곳을 향해 건물을 기어오르는 주인공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주인공은 결국 재난을 물리치고 생명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이처럼 우리도 앞서 말한 ’죽음‘행 버스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버스 안에 있는 비상용망치로 창을 부수고 ’엑시트‘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장 12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 27절)
안타깝게도 성경의 말씀은, 모든 노력에도 결국 인생은 죽음에 이르게 되어있다고 못을 박는다. 그런데 사실 그게 끝이 아니다. 성경은 뒤이어 모든 이에게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버스가 종착역에 도착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란 이야기다. 하나의 문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문의 위에는 ’심판‘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의 ’심판‘은 ’영생(life)‘과 ’지옥(hell)’을 가르는 심판이다. 죄를 지은 자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
이러한 심판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 영화는 웹툰을 원작으로 한 <신과 함께: 죄와 벌>이 아닐까 한다. 원작 웹툰에서는 향년 39세로 세상을 떠난 김자홍이 저승의 심판을 받을 때, 변호사 진기한이 나서 그를 변호해주고 그의 선행을 주장하며 무죄를 이끌어낸다.
결국 죽음 이후 심판에서 ‘영생’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영화 <엑시트>의 주인공이나 <신과 함께>의 김자홍처럼 나보다 먼저 타인을 구해주는 선행을 쌓고 착하게 열심히 살면 될까?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힘으론 영생의 문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한다. 영생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며, 이 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이를 믿을 때에만 온전히 사라질 수 있다.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자에게만 영생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생사가 걸린 문제가 발생하는 재난 영화 속에서도 구원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재난영화 속에서는 이런 구원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다음에 여러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