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제들>
먼 과거의 누군가는 문명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이 하루 3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고 예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런 예견이 꿈과 같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정치적 캐치 프레이즈가 이슈가 될 정도로 삶의 여유가 없어졌다. 신자유주의 시대로 접어든 이후에 빈부의 격차는 점점 깊어지고 있다. 한 베스트셀러는 그 격차라는 것이 누군가는 연봉 1,000억원을 벌기도 하고 집 1,000채를 가지고 있기도 한 반면에, 누군가는 월세 낼 돈이 없어 자살할 정도로 극단적이라고 표현했다. 무한도전에 출연했던 미생 윤태호 작가는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라고 현실을 진단했는데, 이는 경제적인 불안감 때문에 일에 매달리다가 도리어 가정이 무너지는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호화스러움을 지양하고 평범함을 추구하는 트렌드에도 역시 그 이면에는 평범함조차 누리기 힘든 사람들의 절절한 호소가 숨어있다. 갈수록 소비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만족스러운 소비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평범함은 과시의 대상으로 올라설 만큼 성취하기 힘든, 평범하지 않은 가치가 되고 있는 것이다(김난도 외, 『트렌드 코리아 2016』, 미래의 창(2015), p.164.).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사회적 폐해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자영업자 폐업률이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인구증가율은 역대 최소를 기록했다. 아파트값도 떨어지기 시작했고, 전국에 제로 분양, 미분양이 속출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경기파탄의 서곡이라면, 최근 몇 년간 뉴스를 장식하는 끊임없는 저소득층의 자살, 학대, 폭력 사건은 변두리에 몰린 사람들이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진행 중인 붕괴’다(“세 모녀 세 모자”, 주간경향, 2016.03.02.).
대중문학에서도 경제문제 때문에 사람이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소름끼치게 보여주는 작품이 있으니 바로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이다. 한국에서 황정민 주연의 영화로도 개봉된 <검은 집>은 보험사기와 관련이 있다. 사치코라는 여인이 한 가정에서 아이를 죽이고 남편의 팔도 절단하는데 이를 모두 자살과 사고로 위장한다. 이는 모두 거액의 보험금을 타내기 위함이다. 사치코는 또한 자신을 방해하는 이들도 거침없이 제거하는데, 오로지 돈을 위해 태연히 사건을 저지르는 그녀나 그녀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남편 고모다는 도무지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이들의 행동은 인간의 행동이 아닌 흡사 악령에 빙의된 모습으로 보인다.
악령이나 악마를 주요 소재로 한 영화를 ‘오컬트’(Occult) 영화라고 하는데, 사전적 의미로는 ‘신비한’, ‘초자연적인’이란 뜻을 가진 오컬트는 ‘밀교(密敎)적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 악마를 숭배하는 사교집단과 이성적인 기독교의 충돌을 그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엑소시스트>, <오멘>, <위커맨>, 최근에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곡성>도 오컬트 영화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오컬트 영화는 악령이 승리하는 경우가 많아서 보는 이들의 기분을 찝찝하게 만들곤 한다. <곡성>을 예로 들자면, 영화는 외지인이 들어온 한 시골마을에서 발생하는 기괴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오컬트 영화의 기본 도식처럼, 여기서도 신부(천주교 또는 기독교)와 무당(무속신앙)이 대조적으로 등장하는데, 먼저 부제(부제품을 받은 성직자)와 무당의 이미지를 봐도 마르고 소극적인 부제와 달리 무당 ‘일광’(황정민)은 강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론 부제도 극 후반에 악령과 싸우기 위해 낫을 들고 악마에게 찾아가지만, 결국에는 무력한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욱이 굿판을 벌여도 딸아이의 귀신들림이 호전되지 않자 교회를 찾은 종구(곽도원)에게 신부는 ‘교회는 당신을 도와줄 힘이 없다. 의사에게 맡기고 믿으라’는 이야기만 해준다. 결국 신부와 무당, 그러니까 종교에 버림을 받은 종구는 자신의 힘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친구들을 모아 악마의 본거지로 향한다. 이처럼 오컬트 영화에서 기독교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습은 영국 공포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으로 회자되는 <위커맨(1973)>에서도 반복된다. 한 소녀의 실종사건을 접한 독실한 크리스천 경찰관이 서머아일이라는 섬에 들어가는데, 그곳에 있는 주민들은 소녀를 모두 못 봤다고 주장한다. 설상가상으로 섬의 주민들은 하나님이 아닌 풍요를 관장하는 고대의 신들을 섬기며 음란한 행실을 일삼는 이교도들이다. 그들이 가뭄을 극복하기 위한 산 제물로 소녀를 바치려고 한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이교도 축제에 몰래 잠입하여 소녀를 구해내지만 도리어 주민들에게 잡혀 인신공양으로 불에 타죽게 된다. 그는 하나님께 구해 달라 외치지만 어떤 구원의 손길도 없고, 다만 이교도들의 흥겨운 노래소리만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난다. 이처럼 ‘신은 없다 내지는 죽었다’라는 허무주의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오컬트 영화는 청소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헐리우드에서는 작년부터 다시 오컬트 영화의 붐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최근 ‘헐리우드가 귀신 들림에 대한 스토리로 회귀하고 있다’고 보도하며 흡혈귀, 늑대인간 그리고 좀비 등이 귀신 들린 캐릭터에 의해 무대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사회가 이처럼 오컬트 영화에 집중하는 이유는, 이런 영화에 매료된 주 관객층이 주로 10대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간의 몸이 불명확한 존재에 의해 쉽게 조종당할 수 있다는, 허무하고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는 소비자이다. 앞서 언급한 월 스트리트 저널은 “내재된 적과 갈등한다는 점에서 오컬트 영화 속 귀신 들림은 좀비나 뱀파이어와의 투쟁보다 개인적인 소재가 될 수 있으며 이를 최근 10대들이 경청하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천주교에서 행하는 구마(驅魔)의식이 중심소재로 쓰인 <검은 사제들>이 개봉하여 호평을 얻은 바 있다. 이 영화는 악령에 빙의된 한 소녀(박소담)을 구하기 위해 성격이 다른 두 사제가 연합하여 위험한 예식을 행한다는 내용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비밀리에 의식을 행하는 장소가 서울 중심부 명동이라는 사실이다. ‘명동(明洞)’이라는 지명만큼이나 이곳은 사람들로 붐비고 밤에는 휘황찬란하게 불빛이 밝혀진 거리이다. 그러나 그러한 밝음 뒤편 어둠속에서는 구마의식을 통해 처절한 악마와의 사투가 벌어지는 것이다.
영화 내내 밝은 명동거리와 어두운 구마 장소는 대비되는데, 여기에는 감독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부유하고 성공한 우리나라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뒷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 아닐까? 누군가는 밝고 따뜻한 곳에서 호의호식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누군가가 어둡고 추운 죽음의 벼랑으로 내몰리는 사회.
젊은 신부 최부제(강동원)는 악령이 빨려 들어간 돼지를 움켜쥐고 한강 다리를 내달린다. 그리고 봉인이 해제되려는 순간에 사력을 다해 돼지와 함께 강으로 뛰어든다. 이 장면에서는 마가복음 5장 12,13절의 성경구절이 떠오른다.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이후 성경에서 묘사된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롭다. 귀신에게 고통 받던 이가 치유를 받고 정신이 온전하여 자리에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던 이들은 예수께서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한다.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왜 모시기 두려워했을까? 몇 가지 의견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경제적인 손실을 두려워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사람보다는 돈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의 문제가 그 당시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문해 볼 것은 우리가 얼마나 우리 사회의 어두움을 직면하고 있는가이다. 악령을 다룬 공포물은 대체로 인간성의 가치가 떨어지고 도덕의 준칙들이 무시되는 시대일수록 인기가 높아진다는 분석이 있다. 죄악을 일으키는 존재를 ‘내’가 아닌 상상 속에 존재하는 ‘악령’으로 가정할 경우 그만큼 죄책감은 적어진다. 사회가 곪을수록 이 같은 방식의 생각은 보편화된다. 우리 시대에 발생하고 있는 모든 악한 사건들을 악령의 소행으로만 치부할 것인가? 아니면 아동학대 등 강력범죄는 사회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파악하고 사회적 약자를 돕는데 힘쓸 것인가?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검은 영화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