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지옥>
대중영화에서 기독교를 다루는 이유 중에 하나는, 기독교가 우리 사회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메이저리티(majority)인 동시에 기독교로 대변되는 기득권 및 보수집단을 우회로 비판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다루는 영화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어떤 이미지로 생각되는지 알 수 있는 리트머스지인 동시에, 반대로 ‘교회는 어떤 곳이다’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기에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기독교를 다룬 공포영화 <불신지옥>의 무대는 소도시 아파트라는 아주 일상적인 공간이다. 희진(남상미)은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은 가운데 서울에서 과외,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잩은 기침이 멈추지 않는 어느날, 어머니가 동생 소진(심은경)이 실종되었다고 알려온다. 소진은 교통사고 이후 기도의 힘으로 회복된 아이다. 그런데 회복 이후에 신기한 능력을 보이기 시작한다. 동생의 실종을 추적하던 희진은 아파트 이웃들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과학의 눈으로 신앙을 보면 무서울 수 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영화의 감독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과 무속신앙의 신(神) 내림이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에서 영화 집필을 시작했다 한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신성모독이라고 화를 낼 수도 있는 일이지만, 다시 한 번 객관적인 눈으로 보면, 부흥회에서 박수치며 부르짖는 모습과 무당이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모습은 모두 외부인의 시선에서는 두려워할만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두 가지 신앙을 같은 것으로 보는 오해의 근원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우선 일반인의 눈에 욕망의 대상으로 신앙을 추구하는 두 종교의 모습이 동일해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일 수 있다. 기도라는 입력(input)이 있으면 축복이라는 결과(output)가 나온다는 자판기식 신앙.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자체 보다는 교회를 다니면 성공의 가도를 달려야 하고, 건강과 부귀영화가 손 안에 들어온다는 이 기복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종교들 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기복의 극단에서 이성을 잃으면 신앙은 광신이 되고, 여기서 공포가 태어난다.
물론 종교인은 신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고 모든 연약함을 아뢰어야 함은 마땅한 일이지만(정말 나의 기도는 무언가 하나 더 얹으려고 하는 욕망의 표현인가, 아닌가?), 말씀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말씀에도 없는 오래된 관습과 전통에 얽매여 생활한다면 그걸 보는 일반인은 교회와 교인을 오해하여 멀리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가장 먼저 실현되어야 할 것은 나의 신앙이 어떤 잘못된 오해로 얽혀있는지 파악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뭔가 다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를 다니면 복을 받는다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세상에 보여줘야 성령과 귀신들림을 같은 선상에 놓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공포영화는 그 영화의 틀에서만 벌어지는 것이며, 특수 분장의 세계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공포영화가 일깨우는 현실의 문제들은 오히려 더 공포스러울 수 있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그저 신앙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보기에는 너무 어지러운 때이다. 지금은 문화가 보여주는 오해를 반면교사 삼아서 신앙의 진정한 이해에 도달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