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는 장기자랑으로 돌멩이나 피해라

픽션|공부 말고는 잘하는 게 없던 미움받는 아이

by 문현웅

내가 다니던 학교엔 사랑반이라는 교실이 있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따로 모아 놓은 일종의 특수학급이었다. 그럼에도 일반반엔 심신이 뚜렷하게 불편한 아이가 꼭 한둘씩은 있었다. 대부분은 부모의 간청 때문이었다. 장애가 있다 해서 국민학교 시절부터 그들끼리만 떼어내 격리해 버리면, 자식들이 사람들 속에서 평범하게 살아갈 길이 영영 막히게 되리라는 두려움이 그들에겐 있었다.


부모들의 심정을 아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일반반에 억지로 섞여 들어간 것이 자녀들 입장에서도 결국 보탬이 됐을지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더라도 여러 모로 의문이긴 하다. 담임 하나에 배정된 아이가 마흔 명을 넘기던 시대였다. 특수한 아이들까지 본인 차원에서 감당하며 보다 신경 써 주는 선생님은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마음 쏟는 수준이 평범한 학생만큼도 못한 경우마저 흔했다. 태반은 단체활동이나 조별과제를 명분으로 관리 부담을 상당 부분 아이들에게 전가했던 것이다.


교사들은 장애아 통제를 학생들에게 넘기고자 연대책임을 엄격하게 물었다. 만일 장애가 있는 아이 때문에 그가 속한 집단의 퍼포먼스가 떨어지면 기합과 책망은 구성원 모두가 받았다. 쟤를 데리고선 과제 수행을 도저히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그런 나쁜 말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장애아가 남들만큼의 성과를 내도록 아이들이 어떻게든 이끌어 주거나. 장애아가 해내지 못하는 만큼을 나머지 학생들이 어떤 식으로건 상쇄해 내거나. 택할 수 있는 해결책은 둘 중 하나여야만 했다. 물론 특수교육 전공은커녕 제 앞가림도 쉽지 않았던 국민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후자뿐이었다. 방과 후 남아서 잔업을 하건, 집에서 노는 시간을 쪼개 과제에 시간을 더 쏟건 말이다.


장애를 바르게 인식하며 배려하는 교육은 극도로 부족했던 90년대였다. 그 와중에 학교는 오히려 애먼 학생들이 그들 때문에 온갖 피해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구조를 앞장서서 조장해 버렸다. 그런 환경에서 기껏해야 열 살 안팎인 미성년들이 불이익을 감수해 가며 장애가 있는 학우와 원만히 어우러지길 바라는 것은 망상에 가까웠다. 아니, 애초에 교사들이 장애아가 나머지 아이들과 정말로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기나 했었을지. 그것마저도 확신할 순 없는 일이긴 하다.


허구한 날 억울하게 매타작을 당하는 아이들은 자연히 장애아를 원망하고 들볶았다. 분노와 증오를 쏟아부으려 한들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으면 학급 임원이나 조장 및 분단장을 대신 압박했다. 카리스마나 리더십보다는 성적에 따라 보직이 좌우되던 시절이었다. 어느 반이나 성적은 우수했지만 내향적이며 유약한 임원이 못해도 하나씩은 존재했다. 장애아를 떠넘기는 하청의 사슬 끝엔 반드시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학급에서는 내가 그러했다.


광호는 힘이 셌다. 근력만 놓고 따지자면 나는 동년배 기준으론 별 볼 일 없는 아이였다. 가느다랗고 마른 내가 절제 없이 힘을 쓰는 광호를 제어하려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은, 아마도 다른 아이들에겐 꽤 우스운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일진들은 광호에게 종종 말했다. 여자애들에게 가서 바지를 벗고 성기를 보여 주라고. 광호는 왜인지 그것을 정말로 보여 주고 싶어 했다. 광호가 웃는다. 그리고선 여자 아이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나는 그러지 말라며 광호를 붙든다. 지적장애가 심했던 광호를 어차피 말만으로 저지할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르건 발버둥을 치건 팔꿈치를 휘두르건 격렬한 저항이 무언가는 뒤따른다. 하지만 절대 놓아줄 순 없다. 선생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결국 혼나고 벌을 받는 것은 내 쪽이기 때문에. 힘에서 밀리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버티다 보면 결국엔 광호와 함께 바닥으로 나동그라지게 된다.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우리를 에워싼다.


한창 절정이던 시기엔 내 안경테의 코받침 부분이 두 달 만에 네 차례 부러졌다. 두 번은 안경테를 바꿨지만, 세 번째에는 차마 부모님께도 말을 하지 못해 모아 두었던 내 용돈으로 새것을 샀다. 가장 싼 제품은 만 오천 원 짜리였다. 안경테라기보다는 철사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것마저도 코받침이 부러져 버렸을 때 내가 마지막으로 한 선택은 납땜이었다. 나는 그즈음을 기점으로 시력이 많이 떨어졌다.


수련회 시즌이 다가왔다. 담임은 아이들 전부에게 장기자랑 준비를 하나씩 해 두라 말했다. 학년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사회자가 반마다 누구를 지목해 불러낼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자 누군가가 말했다.


"장기자랑 할 거 없는 사람 있냐?"


"광호 어떡하냐?"


"고추 까면 되지."


광호가 일어서며 바지를 벗으려 했다. 남자아이들이 웃었다. 나는 달려 나가 광호의 팔목과 바지춤을 붙들었다. 일진 하나가 뛰쳐나온 나를 향해 턱짓했다.


"야, 너는 장기자랑 할 거 뭐 있냐?"


"아..."


나는 말문이 막혔다. 장기랍시고 남에게 널리 선보일 만한 것은 솔직히 떠오르지 않았다. 굳이 특기를 꼽자면 공부나 속독 정도였겠으나, 장기자랑의 일환으로서 무대에 올라 펼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은 분명 아니었다.


"저게 문제네."


"어떡하냐 저거?"


"너도 고추 깔래?"


아이들이 웃었다. 나는 울고 싶었다. 차라리 울었어야 했는데. 부모님도 선생님도 당황해서 무슨 일이 있었나 들여다볼 정도로 아주 요란하게 울어 젖혔어야 옳았는데. 쓸데없이 자존심은 두툼했던 아홉 살의 나는 아이답게 우는 것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눈물을 삼키는 나의 귓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는 우리가 돌 던질게, 그거나 피해라."


"...?"


"너 피하는 건 잘하잖아."


문득 떠올랐다. 한창 피구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체육 시간엔 모두가 참여하는 피구 경기가 흔히 열렸다. 나는 다른 것은 거의 못해도 회피 하나만은 평균을 훌쩍 웃도는 수준이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공격과 수비 측면에선 팀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는 주제에, 생존성 하나만 유달리 높아서 막판까지 남아 눈에 띄는, 그러한 존재였다. 비단 일진 무리가 아니더라도 고깝게 여겼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더군다나 아이들 사이에선 평소 이미지나 평판이 그리 좋지도 않은 녀석이니 말이다.


"쟤 연습 좀 시켜라, 이따 학교 끝나면."


리더 격인 일진이 지령을 내렸다. 후환이 두려웠던 나는 그들의 눈을 피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연습을 거부하지도 못했다. 그 어떤 대체 행위를 장기로서 제시한들 일진을 위시한 아이들은 받아줄 리 없었다. 그저 담임 지시로 다들 준비하는 장기자랑을 홀로 회피하는 이기주의자로 몰릴 것이 뻔했다. 그것도 학급 임원이라는 녀석이.


방과 후 나는 운동장 한가운데 섰고, 아이들은 구령대 부근에서 돌을 던졌다. 대부분은 턱없이 빗나갔지만 아슬아슬하게 다가오는 것도 더러는 있었다. 그나마 가까운 곳에서 던지지 않았던 것은 딱히 나를 위한 배려는 아니었다. 아이들 입장에서도 내가 돌에 맞아 다치는 상황은 적잖은 리스크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구령대와 운동장 한복판 사이 거리는 그저 나를 향한 조롱과 모욕을 비교적 안전하게 표출하기에 적당한 간격일 뿐이었다.


날아온 돌 하나가 안경 테두리를 때렸다. 그나마 힘이 덜 실렸던 것인지, 아니면 철사처럼 가느다란 안경테가 운 좋게 충격을 잘 받아낸 것인지, 긁힌 자국 이외엔 별다른 손상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알 쪽에 맞아 깨졌어야 했는데. 내 눈이나 얼굴까지 다쳤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안경을 매만지며 나는 그런 생각을 문득 했다.


이른바 '연습'은 수련회 직전까지 이어졌다. 수련회 당일날, 나는 바지를 벗을 준비가 된 광호 옆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차라리 사회자가 나를 지목해 주길 바라면서. 내 장기는 같은 반 애들이 보름 넘게 연습을 시켜 준 돌 피하기라고, 강당 안 전부를 울리는 마이크에 대고서 말할 기회를 얻길 남몰래 희망하며.


이윽고 우리 반 차례가 다가왔다. 일진들은 멘트를 읊으려는 사회자에 앞서, 빠르게 손을 들고 장기자랑을 선보일 아이를 추천했다. 그들의 리더 격인 녀석이었다. 사회자의 안내를 받아 무대에 오른 그는, 필경 오래도록 준비했을 고난도 춤동작을 음악에 맞춰 멋들어지게 소화해 냈다. 모두의 환호 속에 장기자랑 무대는 마무리됐다. 돌 피하기는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수련회 도중에도, 수련회가 끝난 이후로도.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Unsplash



keyword
이전 03화아홉 살 되던 해, 캠핑에서 두 끼니를 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