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내게도 혼자만의 시간은 필요했다, 비록 국민학생이라 할지라도
"서울대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담임의 말에 어머니는 적잖이 놀란 듯했다. 무리는 아니었다. 아들이 영리하다는 소리야 종종 듣긴 했다. 그래 봐야 성적으로 환산하면 전교 10등 밖이었다. 더군다나 무슨 서울의 명문 사립 국민학교에서 경쟁을 벌인 것도 아니다. 학생 열명 중 줄잡아 두셋은 농부의 아들인, 도시 외곽의 평범한 공립학교에서 줄을 세운 결과일 뿐이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 털은 함함해 보이는 것이 세상 이치라지만, 당시로선 기껏해야 그 정도였던 아들의 장래에 무려 서울대가 거론되는 상황은 어머니로서도 한참이나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다.
"서울대 입시에 필요한 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제2외국어뿐입니다."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정년이 가까웠다. 교단에 섰던 오랜 세월을 헤아려 보건대 이런 반응을 접했던 일이 그리 드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담담한 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지금은 10개 넘는 과목을 평균 내서 등수를 매기니 성적이 좀 낮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입시랑 상관없는 과목을 빼고 다시 계산하면, 실제로는 시험마다 전교 1~2등을 왔다 갔다 하는 점수입니다. 특히 국어랑 사회를 특출나게 잘하니 문과로 가면 분명 두각을 보일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어머니를 두고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소설가요."
진심이었다. 한창 사람을 피해 책 속으로 깊이 빠져들던 시기였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비로소 자유로웠다. 그러한 매혹적인 세계를 언젠가는 스스로의 힘으로 직접 창조해 보고 싶었다.
"소설가 되려면 공부 잘해야 하는 거 알지? 너 혼자만의 머릿속 상상으로 실제로는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하니까."
"네."
"이문열이나 최인훈, 김승옥, 이청준 같은 분들도 다 서울대 나왔어. 아는 것이 많아야 소설이 되는 이야기를 잘 만들 수 있는 거야. 수학이랑 영어 기초를 잘 쌓아 두면 충분히 서울대 갈 수 있으니, 지금부터 공부 열심히 하자."
학부모 상담을 마치고 돌아온 날 밤, 부모님께서는 조심스레 제안했다. 이제는 보습학원을 알아보도록 하자고. 마침 집 근처엔 주요 과목을 모두 커버해 주는, 지역에선 나름대로 규모가 상당한 수준으로 꼽히는 종합학원이 있었다. 그 학원 원장님은 수완이 상당히 좋았다. 듣기론 그가 세심하게 짚어 주는 학교별 중간고사 및 기말고사 예상 문제는 적중률이 상당했다. 인근 학교 선생님들이 쓰는 학습 참고서 전과를 모두 파악해 두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그래서인지 그 학원엔 동네에서 공부 좀 한다는 상위권 학생들은 물론, 자녀가 그러한 존재 중 하나가 되길 희망하는 집안의 아이들이 두루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선 말했다. 방과 후엔 그저 집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싶을 뿐. 내 마음은 국민학교에 입학한 이래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노라고.
나는 태생이 약한 아이였다. 조금만 무리하면 코피가 났고, 야외 조회 시간에 햇볕을 견디다 못해 쓰러지거나 탈수 증세를 보이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토록 위태로운 아이를 두고서 맞벌이를 다니는 부모님은 나와 동생에게 늘 안쓰러운 마음이 있었다. 어린 아이가 외롭고 불안할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하는 것도, 가계가 넉넉지 않은 탓에 남들만큼 누리도록 해 준 것이 무엇 하나 없는 현실도. 그저 다 미안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달리 바라는 것이 없었다. 단지 세상과는 격리된 나만의 시간을 필요로 할 뿐이었다. 고작 십여 년에 걸친 생애를 살아오는 동안에도 나는 타인들과 얽히고 부대끼는 삶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가족이나 일가친척 이외 인간과의 교류가 내게 안식이나 위안을 주었던 사례를, 적어도 그 나이 때까지는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배움의 공간보다는 고독한 휴식 쪽이 훨씬 절실했던 것이 그 시절의 나였다.
사실 학원 이야기가 우리 집에서 금번을 계기로 처음 거론됐던 것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피아노 학원이라도 다녀 보라는 권유는 진즉부터 있었다. 다름 아닌 '학원 차량' 때문이었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집에서 초등학생 걸음으로 1시간 20분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이가 아파트에서 초등학교까지 이르는 길에 횡단보도가 두 개만 있어도 노심초사하는 요즘 시대 기준으로 보면 아동학대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 시절엔 그러한 학교 배정도 그리 드물지 않았다.
그나마도 학교에 이르는 도로가 평탄하고 잘 닦인 것도 아니었다. 굽이굽이 산을 넘으며 주변을 둘러보면 논밭 외에 별다른 건물이 없는, 해가 저물면 어른조차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운 전형적인 시골길이었다. 하지만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은 원에서 제공해 주는 등하교 차량 덕에,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무릎까지 빠지는 진창을 굳이 걸어서 통과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저간의 상세한 사정까진 모를지언정 내가 또래와 마주하는 것 자체를 기피한다는 사실만큼은 어렴풋이나마 인지했던 부모님은, 악기가 한 대씩 놓인 방에서 개인 교습을 받으면 되는 피아노 학원이라도 다니며 차량을 얻어 타라고 이따금 제안했던 것이다.
물론 그마저도 나는 내켜하지 않았다. 역시나 문제는 등하교 차량 그 자체였다. 어차피 국민학교 저학년 나이대엔 절대다수가 개인의 성향이나 의지를 표명하기보다는 그저 부모님이 정해 주는 대로 학원을 가기 마련이었다. 피아노 학원이라 해서 딱히 순한 아이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보습학원이라 한들 모범생만 발을 들였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학원 스타일이나 성격과는 상관없이 내게 불편한 아이들은 도처에 퍼져 있었다. 그들과 같은 버스에서 접촉하며 몸을 부대끼는 상황 자체를 원천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나는 한 시간 넘게 홀로 걸으며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하교 시간을 오히려 사랑했다. 비 냄새가 살짝 섞인 바람을 맞다 보면 당장 어느 곳이라도 모험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고양감이 차올랐다. 안개에 젖은 능선을 고요히 넘을 때에는 금방이라도 눈앞에 미지의 세계가 펼쳐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하염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서울대 입시를 위해, 인간관계로 고통받는 일상을 방과 후에 이르기까지 연장해 가며, 내겐 잔혹한 삶 속의 안식과도 같았던 혼자만의 시간들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학원을 가지 않았다. 국민학교 시절에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물론 담임 선생님 말씀대로 그때 공부에 조금 더 집중하고 힘을 쏟으며 학업의 기초를 보다 단단하게 다져 두었더라면, 훗날 대학교 이름까진 아니더라도 학과 명칭 정도는 조금 더 멋진 방향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이 존재했다는 이유로 당시의 선택을 이제와 대단히 후회하는 것도 아니다. 학창 시절 또한 엄연한 내 생애의 일부였다. 비록 성인 이후의 인생을 대비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 마땅할 시기라 할지언정, 그러한 때에도 나는 나름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었으리라 믿고 싶은 것이다.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