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속이는 영웅의 서사
시간을 알차게 쓰는 누군가에 맞서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우주의 균형을 맞추고 있던 대학 새내기 시절 어느 날, 이름만 걸어두다시피했던 한 소모임을 통해 저소득층 학생을 위한 이벤트에 공부 노하우를 전하는 연사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문득 받았습니다.
일단 마이크를 잡기로 약조는 했습니다만, 막상 제 인생을 돌이켜 보니 애들에게 도움 될 만한 극적인 이야기가 도통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사실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을 갓 넘긴 여물지 못한 풋사과 치고, 다다른 곳이 남들보다 조금 나을 순 있을지언정 살아온 인생 자체가 드라마틱하게 다른 녀석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어차피 암만 고민해 본들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었고, 결국 강연 현장에선 이 정도 수준의 문답만이 오갈 수밖에 없었는데요.
Q. 재수를 하지 않고 한 번에 대학을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지요?
A. 고등학교 3년 내내 기숙사 생활을 하며 많아봐야 주 1회만 외박이 가능했었는데요. 더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어서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자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Q. 성적을 올리기 위해 주로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요?
A. 녹색 야채를 많이 먹고 숙제를 열심히 했습니다.
Q. 정말 그뿐인가요?
A. 매일 수업+야자가 15교시까지 이어졌고 기숙사에도 밤 10시 넘어야 들어갔는지라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는걸요.
Q. 수능 때 수학 점수를 대폭 끌어올린 비법은 무엇인지요?
A. 솔직히 9월 모의고사와 수능 사이 기간에 대단히 한 것은 없었고, 그저 수능 때 4점짜리 문제를 찍어서 맞추는 잭팟이 터졌습니다.
Q. 운도 실력 아닌가요?
A. 운은 운이고 실력은 실력입니다. 실력을 점수로 환산하면 90점대인 학생이 운에 따라 80~100점을 맞기도 하는데, 80점도 100점도 모두 그 학생 실력이라 말하긴 좀 그렇잖아요. 다만 실력이 있어야 운이 정말 나쁠 때에도 찍을 수 있는 점수대가 높아지며, 변동폭 자체도 좁아지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해 둘 필요는 분명 있다 생각합니다. 평균 95점 맞던 애가 갑자기 60점으로 떨어지는 일은 잘 없잖아요.
강연을 마친 뒤 주최 측 관계자분께선 하하 그래도 애들이 기대 많이 하고 왔으니 비법이나 스킬을 좀 더 알려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라며 슬쩍 아쉬움을 표하셨는데요. 당시엔 그러게요 이런 자리가 익숙지 않아서요 정도로 머쓱한 답을 했습니다만. 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기를 전수한답시고 괜한 과장이나 훈수를 섞지 않았던 것에 딱히 후회가 없긴 합니다.
대개 ‘성공 스토리’라 하면, 정석을 벗어나는 대담한 발상이나 과감한 행동, 혹은 보통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노력 등이 이야기 곳곳에 녹아들어 있어야만 제값을 한다는 느낌이 들죠. 그러다 보니 회사나 학교 등에서도 어지간하면 눈에 띌 정도로 남다른 배경을 지닌 분을 주로 연사 또는 멘토로 모시곤 하는데요.
하지만 그들의 영웅적인 서사 전부가 진실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요. 일단 개인적으로도 과거 인터뷰 부서에서 1년 남짓 근무하며 이른바 ‘인생의 승리자’로 통하는 셀럽을 다수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어느 모로 보아도 납득 가는 훌륭한 길을 걸어온 전문가 분도 당연히 적잖았으나, 의외로 많은 인물이 아래 유형 중 하나에 속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첫째로, 승승장구한 배경을 감추거나 속이는 스타일이 있었습니다. 기자들이 남이 하는 말을 대충 받아 적고 인터뷰랍시고 내보내는 듯하지만, 나름 제대로 된 언론사라면 그 이면으로 상당한 수준의 교차 검증을 수반합니다. 그리고 조사를 하다 보면 첫 창업을 시작한 건물 소유자가 가족이었다거나, 주요 실적으로 내세우는 공훈이 실제론 조직 내부의 특정 인물 밀어주기였다는 사실쯤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고요.
둘째로, 요행을 실력으로 포장하는 유형이 있었습니다. 로또를 예로 들자면, 당첨자 대다수는 거액을 얻은 비결을 물으면 그저 운이 좋았다 정도로 말하고 맙니다. 하지만 꼭 우연에 따른 횡재를 인정하지 않고서 치밀한 분석과 냉철한 판단을 기반으로 당첨에 이르렀다 주장하는 이가 존재합니다. 투자 관련 분야에서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상이었죠.
셋째로, 아예 하지 않았던 행동을 성공 방정식인 양 말하는 부류입니다. 몇몇 TV 프로그램에서 맛집들이 무슨 비법이랍시고 손길 한 번 삐끗하면 사약이 될 국물을 고아 내는 모습을 연상하시면 될 듯합니다. 이런 사례는 대개 별것 없는 음식을 홍보마케팅이나 바이럴로 띄웠다는 사실을 감추거나, 역으로 실존하는 비법을 알리고 싶지 않아 가짜 레시피를 연막으로 치는 것인데요. 완전히 꾸며진 ‘성공 스토리’의 탄생 또한 이와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긴 합니다.
이처럼 극적 효과를 노리고자 팩트는 죽이고 양념만 진하게 먹인 성공 스토리는, 헤매는 이에게 잘못된 길을 제시하는 망가진 이정표 노릇을 하기 십상입니다. 그 폐해는 다나카 요시키가 집필한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 ‘은하영웅전설’에 언급된, 주인공 중 한 명인 양 웬리의 대사로 정리할 수 있죠. “위인이니 영웅이니 하는 자들의 전기를 아이들에게 읽히다니, 그런 어리석고 천박한 짓이 어디 있어? 선량한 사람에게 정신이상자를 본받으라는 것과 똑같잖아.”
아무튼 그렇다면 거짓 성공담을 퍼트리는 사이비는 어떻게 피할 수 있나요?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요. 100%까진 아니어도 상당수는 걸러낼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바로 동종업계나 주변인에게 평판 조회를 하는 것입니다. 기자들도 현업에서 종종 쓰는 방법인데요. 실제로 해 보면 전문가를 자처하거나 성공 신화를 과시하는 인물마저 남들 입에선 “걔가?”라는 식으로 반응이 나오는 때가 드물지 않긴 합니다.
이 정도 검증조차 ‘전문가’분께 실례가 될 듯해 꺼려진다면요? 별 수 있겠습니까. 하상욱 시인 표현처럼, 성공한 사람의 인생이 포장돼 평범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꼴을, 연사 초청비 들여가며 구경하는 수밖에요.
*이 글은 플랜비디자인의 제안으로 출간된 '솔직히 당신 열정엔 관심 없어요' 서적의 일부입니다.
브런치북을 통해 이어지는 작가의 길은 여러분께도 열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