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당신 열정엔 관심 없어요

의도는 좋았다...만

by 문현웅

어제였나 그제였던가, 집 앞에 놓인 택배를 뜯었더니 주문했던 상품에 앞서 그 위에 얹힌 종이 한 장이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제조사에서 그들의 브랜드 철학을 고객에게 전하고자 동봉한 팜플렛이었는데요. 청정한 지구와 인간 삶의 바른 조화를 추구하고자 생분해되는 친환경 소재를 적극 활용했다, 대략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이념 자체야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그럼에도 동참할 마음은 선뜻 들진 않았습니다. 자연 파괴론을 추종하는 입장이라 그랬던 것은 아니고요. 제값 내고 산 물건이 구석 일부나마 분해되다 만 듯한 모양새로 도착한 꼴을 봤으면, 그 누구라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기분 탓인지 우그러진 부분에선 이상한 냄새가 나는 듯도 했고요.


환경 생각도 좋다지만 일단은 멀쩡한 제품이 필요했던 입장인지라, 암만 훌륭한 이상에 기인해 개발한 녀석일지라도 거두어 쓸 마음이 도통 들질 않았습니다. 설령 보기와 달리 실제로는 썩은 것이 아닌 단순 파손이었을지라도, 아무튼 배송 중 받는 충격 정도에 망가지는 물품을 착한 기업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꾸역꾸역 쓰고 싶지도 않았고요. 결국 그 상품은 박스 뚜껑을 도로 봉해 반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작 의도는 나름 고매할지언정, 정작 결과물은 클라이언트나 고객의 니즈와 어긋나는 통에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상품이나 프로젝트가 그리 드물진 않습니다. 이를테면 버거킹은 지난 2013년 9월 북미 지역에 기존 제품 대비 칼로리는 30% 낮고 지방은 40% 적은 프렌치 프라이인 ‘새티스프라이’(Satisfries)를 출시했는데요. 1년도 채 지나기 전인 2014년 8월 실적 부진을 견디지 못하고 판매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버거킹


당시 글로벌 트렌드였던 웰빙에 발맞춘 것까진 좋았습니다만. 가격은 20~30센트 더 나가는데도 맛은 훨씬 못한 제품을, 굳이 건강을 챙기겠다며 일부러 찾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는 점이 패착이었다 합니다. 물론 칼로리에 신경 쓰는 인구 규모도 상당하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이라면 웬만해선 애초에 패스트푸드점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을 테고요.


‘플레이펌프’(Playpump)도 비슷한 맥락에서 꽤 유명한 사례 중 하나죠. 우물에 아이들이 매달릴 수 있는 뺑뺑이를 달고 펌프를 연결해, 타고 놀기만 해도 물이 나오는 장치를 실제로 구현한 것이었는데요.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놀이와 물을 함께 선사하겠다는 이 아이디어는 상당한 주목을 받아, 세계은행이 ‘시장개척상’을 수여하고 빌 클린턴 재단이 1600만달러를 제공할 정도로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현역으로 구르는 플레이펌프가 단 하나도 남은 것이 없는데요.


플레이펌프./flickr


여기서도 결국 문제는 ‘니즈’였습니다. 아프리카 주민이 기존에 쓰던 핸드 펌프는 물을 20리터 퍼올리는 데 약 28초가 걸렸습니다. 반면 플레이펌프는 같은 양의 물을 끌어 올리기까지 3분 7초 가량이 소요됐습니다. 플레이펌프로 주민 2500명에게 물을 15리터씩 제공하려면 무려 27시간을 쉬지 않고 연속해 작동시켜야 했고요. 노는 재미로 고역을 상쇄할 수준은 이미 아득히 넘어선 셈이죠. 사실 아이들은 국적을 막론하고 뭘 갖고 놀아도 초 단위로 질리거늘, 플레이펌프를 몇 년이고 진득하게 돌리리라는 기대부터가 애초에 크나큰 계산 오류기도 했고요. 결국 남아프리카 일대에 2000여개 가까이 뿌려졌던 플레이펌프는, 현재 대부분 흉물로 전락하거나 주민 요청으로 철거되는 신세에 처해졌다 합니다.




물론 스토리텔링만으로도 승부가 가능한 시장이 아주 없는 것까진 아닙니다만. 현실에선 이래저래 상품 퀄리티는 제쳐두고서 메시지’만’으로 평가받긴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프로젝트 론칭 배경에 숨은 사연이 암만 절절하더라도, 제품이 세상 빛을 보기까지 투입된 노력이 규모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울지라도, 혹은 온누리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거룩한 이상에 의거해 만들어진 물건이라도 정작 소비자가 거들떠보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이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그들의 제품을 도외시하는 고객이 딱히 제작자의 노력이나 의도, 열정을 애써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품질에 어느 정도 만족하면 생산자가 외치는 이념이나 호소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된 소비자도 적지 않습니다. 다만 어른들의 세계에선, 그리고 프로들의 세계에선, 고객의 니즈를 충족해 주는 알맹이는 없이 그저 배경과 메시지만을 내세워 인정을 받기는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일 뿐이죠.


일단은 라면요리왕 등장 인물인 세리자와 타츠야(오른쪽)입니다만... 원작에 이런 장면이 있던가요?/루리웹



*이 글은 플랜비디자인의 제안으로 출간된 '솔직히 당신 열정엔 관심 없어요' 서적의 일부입니다.

브런치북을 통해 이어지는 작가의 길은 여러분께도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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