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사기를 유지하는 전략
기자 시절 저는 그래도 후배들이 꾸려온 발제나 기획, 아이디어는 웬만하면 밀어주려 노력하는 축에 속했습니다. 물론 제가 유달리 성인군자나 박애주의자라 그랬던 것은 아니고요, 애초에 전 직장과 그쪽 업계 분위기 자체가 대체로 그러한 편이긴 했는데요.
따지고 보면 언론사라 해봐야 정부에 속한 첩보 기관도 아닌 만큼 별다른 법적 권한도 없는지라, 기자에게도 남들보다 먼저 정보나 소식을 접하고 뉴스로 가공하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만큼 애써 취재한 내용이 덧없이 묻히면 반동으로 오는 실망 또한 상당했고요. 그러다 보니 구성원이 의욕을 잃거나 복무 염증을 앓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조직 관리 차원에서도 상급자가 가급적 후배의 기사를 살려 주려 노력하며 사기를 북돋거나 유지할 필요가 있었죠.
이는 비단 언론 쪽 만에만 통용될 논리는 아닐 것입니다. 회사를 막론하고 임직원이 총력을 투입해 준비하는 프로젝트는 늘 존재하고요. 그럼에도 기껏 온 힘을 다해 준비한 기획이 허망하게 무산되는 경우 또한 드물지 않습니다. 물론 시장의 급격한 변화나 코로나 창궐 등 충분히 납득 갈 만한 연유로 사업 방향이 달라졌다면 웬만해선 별다른 문제 소지가 없습니다만. 의외로 그저 윗선의 취향이나 감각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프로젝트가 엎어지는 경우도 꽤 흔하죠.
조직에선 무엇보다 상급자의 의지가 중요하다지만, 하급자의 근로 의욕 또한 무시 못 할 요소이긴 합니다. 수명과 열정을 갈아 넣은 작품이 윗사람의 고갯짓 한 번에 녹아내리는 상황을 거듭 접하다 보면, 누군들 향후로도 정성을 다해 일할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것도 심지어 주관적이거나 분명치 않은 이유에 휘둘린 것이라면 더욱이나요.
그런 만큼 회사에 큰 무리를 주지 않는 선에서라면, 별달리 쓸모없어 보이는 프로젝트라도 일단 발동한 이상 끝을 보게 해 주는 것이 때론 조직 관리 측면에서 유리한 선택일 수도 있겠습니다. 일단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쑤셔 보자는 식의 단순한 논리는 아닙니다. 그저 프로젝트의 결실을 보고자 힘껏 달려온 이들에게 결말에 이를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며 근로 의욕을 높이자는 것이죠. 역사적으로도 맥락이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데요.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할 당시 벌어졌던 일입니다.
그는 스털링 성을 공략하기 위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투석기인 ‘워울프’를 동원했는데요. 130kg에 달하는 돌덩이를 날리는 기계인 만큼 운용이 쉽지 않았고, 실제로 마차 30대를 동원해 나른 재료를 50명이 석 달에 걸쳐 조립한 끝에야 간신히 발사 준비를 마쳤다 합니다. 문제는 완성된 투석기를 보자마자 농성하던 적군이 항복을 선언했다는 것인데요.
쓸모가 없어졌다 해서 워울프 프로젝트를 즉각 폐기하면 개발과 자재 조달, 조립에 힘썼던 부하들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에드워드 1세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많은 이들의 공로가 아주 헛되진 않게, 워울프를 딱 한 발만 쏘고 항복을 받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날아간 성벽을 보며 병사들은 환호했고, 에드워드 1세는 돌덩이 하나와 성벽 보수 비용 정도만을 추가로 지출하고서 군의 사기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야 내키지 않는 프로젝트 완주를 위해 인력과 돈을 붓는 것이 아까울 수는 있겠습니다만. 위에 언급한 잉글랜드 사례에 비추어 보면 이 정도는 ‘조직 관리’ 내지 ‘조직의 사기 유지’를 위한 비용으로 해석할 여지 또한 존재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어느 모로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프로젝트야 한시라도 빨리 폐기함이 마땅하겠지만, 하려면 할 만한 프로젝트나 내버려 두면 밥값 정도는 할 만한 기획이라면, 조직 관리와 사기 유지 차원에서 약간은 아량을 베푸는 것도 고려해 보심이 어떨까 합니다.
*이 글은 플랜비디자인의 제안으로 출간된 '솔직히 당신 열정엔 관심 없어요' 서적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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