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은 맛있다
오래된 집들은 맛있다.
1년 이내 문을 닫는 음식점이 50%고 5년 이상 살아남는 음식점은 30%라고 하는 시대다. 요식업계는 이렇게 경쟁이 치열하다. 그럼 이 수많은 음식점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뭘까.
식품업계에 몸담은 이들을 만나 이 질문을 던지면 한결같이 가장 먼저 말하는 핵심은 '맛'이다. 오랜 시간 동안 고객들에게 사랑받는 음식점들은 뭐가 있을까. 이 글은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오래된’이라는 말의 정의를 고민했다.
사전적 정의로 ‘오래되다’의 뜻은 아래와 같다.
[형] 오래-되다 ‘시간이 지나간 동안이 길다.’
한국에서 음식점이 15년 이상 되면 한 지역(동네)에서 터줏대감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오랜 시간 동안 운영된 가게들이 많긴 하지만, 일단 15년 이상 맛을 지켜온 가게들을 기준으로 삼는다. 맛과 서비스에 대한 평가는 각기 다를 수 있으나, 글의 성격상 최대한 경험에 의거해 작성한다.
을지로 조선옥 갈비탕_ since1937
나에게는 매주 수요일마다 만나는 여자가 있다.
그녀와 나는 매주 만나 책을 교환하고 농담 따먹기 같은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그날은 더위에 찌든 얼굴로 만나 중구청에 주차를 하고, 을지로 한복판에서 점심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누굴 만나도 식사 메뉴는 머릿속에 서울 맛집 지도가 들어있는 내가 결정하는 일이 많다. 일단 나에게 ‘이게 맛있다’며 추천하는 일 자체가 드물다. 다들 ‘니가 고르면 따라갈게’라는 반응이 많다.
‘이제는 주는 대로 잘 먹을 수 있는데…’
음식에 까탈스러웠던 예전의 나를 탓해보지만 뭐 어쩌겠나. 포기해야지.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더운데 그냥 이 근처에서 먹을까? 고민 좀 해보자”
“내가 오늘 먹어야 할 게 있어.”
“뭔데 그게?”
“갈비탕 먹으러 가자”
그녀와 알고 지낸지 6년이 넘었지만 자발적으로 ‘어디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일은 손에 꼽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다. 세운상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어차피 길눈이 어두워 지도도 못 보고 길도 못 찾는 나는 그저 따라갈 뿐이다.
을지로 조명, 타일 상가들은 나에게 그저 체스 판 같다. 다 가게가 똑같이 생겼는데 대체 이걸 어느 골목인지 기억하는지. 한참을 걸어가 타일가게 안 골목에 쏙 들어가니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는 아저씨들이 서 있는 허름한 가게가 보인다. 조선윽은 1937년도에 개업해 3대를 이어 성업 중인 유명한 식당이란다. 그 날의 인상은 ‘오 괜찮아 보이는 가게인데?’정도였지만.
점심시간을 살짝 넘긴 식당 안은 한산했다. 가게는 오래된 식당 치고 꽤 넓고(방과 테이블로 나뉘어져 있다)에어컨도 잘 나온다. 가구는 오래된 느낌이 든다. 비슷한 메뉴인 곰탕을 파는 명동 하동관보다 훨씬 넓고 쾌적하다.
메뉴는 갈비탕, 갈비탕보다 유명하다는 소갈비, 여름을 맞아 냉면 두 종류와 장국밥, 대구탕(생선 요리인 줄 알았다) 등 고기를 충실히 사용한 메뉴들이다. 소갈비는 소갈비답게 가격이 좀 된다. 술은 소주와 막걸리, 매실원주 등도(의외로) 갖춰 놓았다. 그래도 제일 많이 팔리는 건 희석식 소주다.
갈비탕 두 개를 시키니 갈비탕과 깍두기, 배추김치가 나온다. 밥은 토렴하는 대신 평범한 공기밥이고, 갈비탕은 간이 되어있지 않고 당면과 고기, 파가 들어있다. 소금, 후추는 직접 자기 입맛대로 넣어야 하는 스타일이다.
맛있다. 결혼식에 가서도 먹는 게 갈비탕이요, 어릴 때도 성장환경 덕에 섭섭지 않게 갈비탕 좀 먹어봤다고 자부했는데 서울에서 오랜만에 맛있는 갈비탕을 만났다. 성의껏 끓인 맑은 갈비탕 국물이다.
말캉한 당면과 통통 불은 밥을 한 입 물고 살짝 언 느낌의 깍두기를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더운 날씨도, 밥을 먹고 해야 하는 일들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계속 먹었다. 입이 짧아 깨작거리기만 하는 사람이 이렇게 얼굴을 박고 먹는 것도 진풍경이다. 젓가락으로 살살 밀어내면 고기가 뼈와 쉽게 분리된다. 고기를 소금에 그냥 찍어 먹어도 맛있고 밥하고 같이 먹어도 맛있다. 고기는 고기다. 물에 빠져도 맛있다.
이곳에 날 데리고 온 그녀는 싱글벙글이다.
“여기 맛있다 진짜로”
“그렇지? 나도 처음엔 갈비탕 안 좋아해서 그냥 그럴 줄 알고 왔는데 생각이 나더라고”
“……(먹느라 정신이 없음)”
“남산예술원에서 결혼식하고 여기서 갈비탕으로 피로연하면 좋을 거 같아”
“난 안 될 거니까 니가 먼저 하겠구나. 꼭 여기서 하렴”
이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나오니 날씨도 참을 만 하게 바뀐 느낌이다. 계산을 할 때 물어보니 실제로 피로연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여기서 하는 사람이 있는가보다. 친구의 농담이 농담이 아닐 줄이야. 깜짝 놀랐다.
그 주 목요일에 자려고 누웠는데 갈비탕이 생각나서 금요일에 다시 한 번 다른 이와 다시 조선옥을 찾았다. 갈비탕을 두 숟갈정도 남기고 나서야 반주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났지만, 밥을 다 먹어버린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반주를 포기했다.
이곳을 방문할 멤버를 늘려 소갈비를 먹으러 가야겠다. 1인 1갈비탕에 소갈비를 들고 뜯어야 제대로 고기 먹는 게 아니겠나.
갈비 장인이 미디움 레어로 구워내는 소갈비에 맛있는 술을 마시면 취하지도 않겠다.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