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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May 30. 2017

미슐랭 추어탕, 용금옥 Since1930

오래된 것은 맛있다

미슐랭 추어탕

용금옥_Since_1930     


나보다 정확히 19년을 더 산 P는 ‘종로’ 남자다. 그는 집과 직장도, 운동하는 피트니스 클럽도,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도, 전시회도, 술자리도, 취미로 배우는 영어까지도 종로 안에서 해결한다.


나는 P와 작년부터 올 초까지 학원에서 일주일에 4일씩 만났다. 저녁 6시 30분이 되면 P는 내 옆자리에 앉는다. 한 시간 반 동안 영어로 대화를 했다. 영어로 대화를 나눈 뒤에는 가끔 다른 클래스메이트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한국어로 얘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수업을 같이 듣는 이들은 많지만 대화 파트너인 P와 주로 대화를 나누기에 P와 가장 친해졌다.

P는 나이는 스무 살 가까이 많지만 어른이라는 이미지보다 ‘클래스메이트’라는 이미지가 훨씬 강하다.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대화한 시간이 훨씬 길어서인 것 같다.      


P는 20년 가까이 종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기에 종로와 중구의 수많은 식당을 줄줄 꿰고 있다. 부쩍 싸늘해진 어느 날 저녁이었다. 평소에는 학원이 끝난 뒤 클래스메이트들과 분식으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곤 했는데 오늘은 모두 선약이 있다고 떠나고 P와 나, 둘만 남았다.

P가 오늘은 좀 다른 걸 권한다. P를 따라 꼬불꼬불한 다동 뒷골목을 헤맨 뒤 도착한 식당이 오늘 얘기할 용금옥이었다.      



“추어탕 먹을 줄 알지? 여긴 서울식 추어탕집이야”


추탕 집인데 아닌 서울식이란다. 그냥 추어탕이면 추어탕이지 남원식이 아니라 서울식 추탕은 대체 뭘 얘기하는 걸까? 그때까지 나는 서울식 추어탕의 개념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조그마한 가게에 들어가 신발을 벗고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한다. P는 오랫동안 다닌 단골답게 주인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눈다.

용금옥은 무려 1930년도에 개점했다. 올해로 87세다. 1907년 개점한 이문설농탕 다음으로 서울에서 가장 오랫동안 영업 중인 노포다. 대를 이어 서울식 추어탕을 만들고 있단다.

통 미꾸라지가 들어간 ‘추탕’은 먹지 못하는 덕에 나는 갈아낸 추어탕을 먹는다. 자리에 앉은 지 몇 분 되지 않았는데 각자의 실리콘 냄비받침이 나오고 이어 펄펄 끓는 지옥불 같은 모양새의 뚝배기가 나왔다. P를 따라 파와 산초, 고추를 대충 넣고 따라온 면발을 집어넣는다.      


면발? 탕에 면발이 들어가나?     


서울식 추탕은 1950년대까지 경상도식, 남원식 등을 제치고 추어탕계의 주류였다고 한다. 이름도 ‘추어탕’이 아니라 ‘추탕’이 맞다. 서울식 추탕은 고기를 기본으로 한 국물에 미꾸라지를 통으로 넣어 펄펄 끓여낸다. 여기에 두부와 버섯, 마늘 등을 함께 넣고 끓인 뒤 고춧가루를 푼다. 사실 둥둥 떠 있는(형태를 유지한) 미꾸라지만 제외하면 육개장하고 굉장히 비슷한 모양새다. 들깨를 푸는 걸쭉한 남원식이나 맑고 시원한 맛의 경상도식과는 확실히 다르다.      


여기에 용금옥 추어탕이 좀 더 다른 점은 이 진국에 말아먹는 면발과 유부 조각이 맛을 더한다는 것이겠다. 펄펄 끓는 뚝배기 안에서 유부를 건져 호호 불어가며 입안에 넣는다. 유부를 한 입 물면 잇새로 뜨거운 국물이 새어나온다. 걸쭉하지 않고 맑은 국물이다. 육개장보다 기름기가 적고 깔끔한 느낌이다.


추탕 마저도 서울 사람 특유의 딱 떨어지는 성격과도 맞닿아있다고나 할까. 오래된 맛이지만 음식은 굉장히 세련된 느낌이다. 그야말로 서울스럽다.     


삶아서 따로 나온 면발을 뜨거운 국물에 풀어낸다. 따끈한 국물이 배어든 면은 금방 국물과 혼연일체가 됐다. 후룩후룩 데이지 않게 조심조심 면발을 삼킨다. 면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 위에 똬리를 튼다. 밖에서 가져온 냉기 대신 몸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충실한 온기가 몸을 휘감으면 그제서 반주 생각이 난다.     


“여기 참이슬하고 카스 한 병 주세요”     


나는 화려한 손놀림으로 소맥을 말아낸다. 맥주 글라스 안에 거품이 일어났다가 수그러들었다. 건배를 한다. 술을 잘 즐기지 않는 P지만 이런 안주에는 그도 술을 마다하지 않는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신 뒤 수업에 관한 얘기를 한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한다.


공기밥 채로 말아낸 추어탕 한 입, 편으로 썰려 나오는 마늘장아찌 한 입, 술 한 모금…


맑은 추어탕 국물에 통통히 분 밥, 거기에 짭짤하면서도 알싸한 마늘장아찌가 어우러지면 그야말로 ‘술, 먹자마자 해장’이다. 술이 계속 들어간다. 대화도 계속 이어진다.     



사실 나와 P는 학원이라는 연결 고리가 없었으면 전혀 접점이 없었을 관계다. 하는 일도, 살아온 세월과 인생의 궤적도 엄청나게 다르다. 하지만 술잔을 앞에 두고 추어탕을 안주 삼으며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이런 걸 보면 사람과 사람은 역시 어떻게 만났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서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나와 다른 그 생각 안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된다.

일 외적인 만남이 굉장히 드문 내 생활에서 P와 클래스메이트들과의 만남은 색다른 이벤트이자 일정이다. 재미있다.      


아, 술을 딱 좋을 만큼 마셨다. 수다 한 입, 밥 한 술, 술 한 모금씩 마셨더니 국물이 식어버렸다. 국물을 더 청하면 따끈하게 데운 탕이 다시 나온다. 술꾼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식당이다.

      

맛있는 한 그릇이었다.

용금옥 밖을 나서자 아까보다 더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친다. 옷깃을 세우지만 코끝은 차가워진다. 하지만 몸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따뜻함과 기분 좋음에 추위도 무섭지 않다. P와 내일 보자고 인사한 뒤 바삐 걸음을 옮긴다. 집에 가는 차에 오른다. 매일 오늘 같은 기분이면 얼마나 좋을까.     


용금옥에 처음 가보고 몇 달 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는 미슐랭 가이드 서울편이 발간됐다.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미슐랭 빕구르망에 용금옥이 등재되어 있었다. 노포의 세련된 맛, 그 ‘서울스러움’이 미슐랭 심사관의 입을 사로잡은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래됐지만 세련됐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 멀리 있지 않다.       


날이 더워지고 있다. 이열치열을 위해 P와 용금옥을 다시 한 번 갈 예정이다. 삼복더위가 오기 전 미리 추어탕으로 보신을 해야겠다. 술도 한 모금 하고.      



오래된 것은 맛있다

사실 오래된 집들은 기본 이상의 맛을 보여준다. 1년 이내 문을 닫는 음식점이 50%고 10년 이상 살아남는 음식점은 30%라고 하는 시대다. 식품업계에 몸담은 이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음식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이라고 말한다. 오랜 시간 동안 고객들에게 사랑받는 음식점들은 뭐가 있을까. 이 글은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오래된’이라는 말의 정의를 고민했다. 사전적 정의로 ‘오래되다’의 뜻은 아래와 같다.

[형] 오래-되다 ‘시간이 지나간 동안이 길다.’

한국에서 음식점이 15년 이상 되면 한 지역에서 터줏대감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오랜 시간 동안 운영된 가게들이 많긴 하지만, 일단 15년 이상 맛을 지켜온 가게들을 기준으로 삼는다. 맛과 서비스에 대한 평가는 각기 다를 수 있으나, 글의 성격상 최대한 경험에 의거해 작성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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