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미 Jul 26. 2017

한여름에 말하는 한겨울, 공주 이학_since1954

오래된 것은 맛있다 

한여름에 말하는 한겨울, 

공주 이학_ since1954     


회사를 다녔던 몇 년간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일’이라는 관계 속이지만 일을 뛰어넘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코드가 맞는 분들이 드물게 있는데, 그 중 가장 멋있었던 남자는 따로 있다. 

공주가 집, 대전이 직장인 중년에 접어든 Y는 사료회사의 홍보부장이라는 직업 외에 하나의 직업이 더 있다. 바로 화가다. 


Y는 지금은 훌쩍 커버린 어린 아들을 위해 직접 동화책을 쓰고 그렸으며, 몇 차례 미술 전시회를 가진 것은 물론 공주 시내에 있는 옛 집을 개조해 아주 아름다운 작업실을 만들었다. 바로 앞 개천이 졸졸 흐르는 한적하고 예쁜 동네다. 이곳은 나에게 맛있는 커피를 얻어 마시며 맘 편히 수다를 떨 수 있는 공간이다.      


겨울, 회사를 그만두고 홀연히 공주로 떠났다. 예상치 못한 눈이 억수로 오는 덕에 공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상 시간보다 세 시간이 더 지나 저녁식사 시간을 훌쩍 넘겼다. 늦게까지 영업하는 석갈비집을 찾아 저녁을 먹고 앞에 말한 작업실에 찾아갔을 때는 열 시가 넘었다. 선물로 들고 간 학림다방 원두를 갈아내 내린 커피를 마시며 Y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꼰대’의 조언이 아닌 ‘멘토’의 조언이었다. 

나에겐 세상을 살아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했다. 당시 나는 대책 없이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이 일을 놔 버렸다. 그 겨울날 휘날린 눈발처럼 정해진 것도 갈 곳도 없었다. 나는 그 날의 대화 화제 속에서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는 실마리랄까, 원동력을 찾고 있었다.     


얘기가 길어졌다. 밤이 꽤 깊었다. 공주 시내에 적당한 숙소를 찾아 잠을 자고 아침이 됐다. 아침 식사를 위해 고민 없이 찾은 식당이 바로 이학이다. 

사실 공주에는-사람들이 잘 모르는-맛있는 게 많다. 잘 구워낸 양념갈비를 먹기 좋게 썰어 철판 위에 얹어 나오는 석갈비도 있고, 전국구로 유명한 짬뽕집인 동해원은 물론 대학생들의 야식이었다는 김피탕(김치피자탕수육) 같은 메뉴들 말이다.     


하지만 처음 공주에 왔던 날 Y가 소개한 이학에서 나는 공주국밥의 포로가 됐고, 자연스럽게 공주에 오면 아침 메뉴는 국밥이 됐다. 눈 오는 시내를 헤치고 민속촌처럼 꾸며진 국밥집 테이블에 앉았다. 

국밥을 주문하고 의미 없이 핸드폰을 뒤적거린다. 세상도 회사도 나 없이 (아마도) 잘 돌아가고 있다.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뭘 그렇게 아등바등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가졌던 책임감은 그냥 종잇장이자 신기루 같은 거였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앉아 있다가 벽에 쓰인 이학의 역사를 읽었다. 

공주 오일장의 장터국밥으로 시작해 어엿한 가게로, 공주를 대표하는 식당이 된 이학의 이야기를 읽는다. 삼 대째 이어져 오는 전통의 맛이란다.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한다. 가본 적도 없는 옛 공주의 오일장을 떠올린다. 추운 겨울에 서는 오일장에서 국밥은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구세주’였을 거다. 나는 누군가에게 겨울 장터 국밥 한 그릇보다 나은 사람이었을까


아, 날씨가 너무 추워 내장까지 얼어붙는 기분이다. 히터를 틀고 난방을 해서 따뜻한 것은 몸의 겉일 뿐이다. 나는 그 때 마음도 몸속도 뼈저리게 추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문한 국밥이 눈앞에 놓여있다. 무심하게 놓인 반찬들도 있다. 

사실 나는 국밥이라는 음식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뜨거운 것을 잘 못 먹는 고양이 혀를 가진 터라 밥을 국에 말아먹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게 느껴지고, 불어터진 밥알은 버석거리기만 한다. 

혹 거기에 양념을 풀어야 하는 국밥이면 국물이 지저분해지기도 하고 너무 짜게 느껴지기도 한다. 많은 국밥집들이 국밥 자체가 메인이다 보니 보통 반찬도 김치를 포함해 두세 가지 남짓을 주니 젓가락이 갈 만한 반찬도 없다.      

하지만 붉은 기가 도는 맑은 국물에 정갈하게 파가 동동 떠 있는 이 따뜻한 국밥은 다르다. 고기와 파를 듬뿍 썼지만 육개장 같지 않다. 육개장보다 연하고 기름기가 훨씬 적다. 육개장이 화려하고 풍성하다면 이학의 국밥은 소박하고 단아하다. 그림으로 치면 원색과 파스텔 톤의 차이랄까. 육개장과 공주국밥은 재료는 비슷하지만 결과물은 많이 다르다.


공깃밥을 위아래로 흔들어 그릇에 넣고 말아낸 뒤 한 술 크게 뜬다. 국물이 겨울 날씨에 얼어붙은 몸과 피폐한 마음에 부드럽게 스며든다. 사골 국물에 파와 마늘, 고기를 넣고 끓인 국밥이 왜 이리 맛있을까. 

맛있는 국밥을 만났을 때는 고개를 숙이고 먹기만 한다. 후룩후룩, 후룩후룩…       

   

내가 뚝배기 끝까지 싹싹 비우는 국밥은 일 년에 채 한 그릇도 되지 않는다. 보통 반 정도 뜨다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 항상 그릇을 말끔하게 만든다.      

그 옛날 한겨울의 오일장에 온 행상처럼, 심부름을 온 아가씨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국밥을 삼킨다. 숟가락을 바지런히 놀린다. 추운 겨울 이학의 장터국밥은 내 몸은 물론이고 복잡했던 마음을 조금씩 누그러트리고 있었다.      


‘맛’이라는 척도로 봤을 때 입이 즐거운 음식은 참 많다. 유명한 파티셰가 만든 화려한 케이크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의 기교 가득한 메뉴들은 언제나 놀라움의 연속이다. 포크를 놀릴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텍스처로 음식이라는 카테고리 밖에서의 상식의 폭도 넓혀 준다. 이런 관점에서 식(食)은 그 자체가 새로움과 배움의 연속이다.     


앞에 말한 메뉴들보다 국밥은 쉽고 흔하며 싼 음식 같지만 생각보다 만들기 어렵다. 맛을 내기 위해서는 레서피보다 ‘세월’의 비중이 큰 메뉴다. 노포 중에 국밥집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입이 즐거우면서 마음까지 편안한 음식은 많지 않다. 비싸지 않아도, 혹은 비싸도 내 마음을 흔들어 쌓인 눈을 털어내고 편안하게 해 줄 정말 음식은 많지 않다. 하지만 낯선 도시에서 만난 이 국밥은 마음을 녹이는 것을 넘어 다른 의욕도 조금은 불러일으켰다.      


국밥을 다 먹고 바라본 주변은 밥을 먹기 전과 아주 조금 달랐다. 카메라 파인더로 보는 세상이 현실 세상과 조금 다른 것처럼, 렌즈 위에 필터를 씌운 것처럼 조금은 따뜻해 보였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지만 조금은 세상이 나아 보였다.  


공주에 가면 언제나 Y와 국밥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눈보라 치는 겨울이 오면 국밥을 한 번 드셔 보시라. 내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오래된 것은 맛있다

사실 오래된 집들은 기본 이상의 맛을 보여준다. 1년 이내 문을 닫는 음식점이 50%고 10년 이상 살아남는 음식점은 30%라고 하는 시대다. 식품업계에 몸담은 이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음식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이라고 말한다. 오랜 시간 동안 고객들에게 사랑받는 음식점들은 뭐가 있을까. 이 글은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오래된’이라는 말의 정의를 고민했다. 사전적 정의로 ‘오래되다’의 뜻은 아래와 같다.

[형] 오래-되다 ‘시간이 지나간 동안이 길다.’

한국에서 음식점이 15년 이상 되면 한 지역에서 터줏대감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오랜 시간 동안 운영된 가게들이 많긴 하지만, 일단 15년 이상 맛을 지켜온 가게들을 기준으로 삼는다. 맛과 서비스에 대한 평가는 각기 다를 수 있으나, 글의 성격상 최대한 경험에 의거해 작성하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슐랭 추어탕, 용금옥 Since193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