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기 위한 몸부림, 놀리 창업기
무모하기까지 했던 제주도행을 마치고 나서도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걱정은 이어졌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해서 밥을 먹고 살아야 하나’라는 실존적인 고민이었다. 나는 이제 어리지도 않은 30대고, 주변의 발 빠른 이들은 벌써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누군가의 부모가 되기도 했다. 과연 나는 어떤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가.
“첫 번째 창업을 그렇게 질렸다고 해 놓고 회사를 다시 차리는 게 맞나?”
“그럼 다른 돈 버는 재주가 나에게 뭐가 있나?”
남들이 다 하는 코인이요 주식에는 큰 재주도, 관심도 없었다. 호기롭게 창업을 결정했던 20대 때와 달리 나이를 좀 먹었다고 앞으로의 행보를 두고 ‘꼴에’ 신중해졌다.
당시 회사 지분을 처분한 조로 얼마의 돈을 손에 쥐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밥을 굶을 정도의 금액은 아니었기에 야금야금 벌어둔 돈을 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못 읽었던 책도 읽고, 바쁘다는 핑계로 쉬던 운동도 하고, 기억 저편에 묻어뒀던 졸업논문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돈을 벌지 않았을 뿐 나름은 ‘갓생’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조언의 말들은 계속됐다.
“몸값 좋을 때 어디든 취직하지 그래요?”
그렇다. 남들에게는 물 위의 백조처럼 우아한 삶처럼 보였겠지만 나도 물밑에서는 부지런히 고민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무슨 직군으로 일을 해야 하나. 10년 가까이 몸담고 있던 업계가 지긋지긋했다. 노는 물을 아예 바꿔볼까. 에이전시라면 치가 떨렸던 시기였다.
그냥 다 놔버리고 취직해야 하나? 공부를 더 해야 하나? 갖가지 고민이 이어졌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였기에 사람을 많이 만날 수도, 무언가 시도하기도 어려웠다.
나도 사람인데.
창업이 얼마나 피폐한 일인지 겪어 봤기 때문에 솔직히 ‘다른 회사를 차려야지’라는 생각보다는 ‘마약 같은 월급’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던 시기였다. 따박따박 정해진 날짜에 월급이 나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잠깐 잊고 있었네.
그 시기 즈음 관심이 있던 회사(온라인 서비스였다)의 브랜드팀에 자리가 났다고 건너건너 소식을 들었다. 브랜딩을 전공하고 있던 입장에서는 어떻게 서류라도 내밀어 볼 만한 직군이었다. 하지만 업계도, 하는 일도 180도 바뀌는 일이었다. 또 고민이 이어졌다.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였다.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라는 마음이 들어 오프라인 미팅을 하려다 중지했다. 새로운 도전이 무섭거나 일을 배울 자신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연차가 늘수록 ‘밥값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나에게 마음속의 여러 말들이 제동을 걸었다.
“내가 잘하는 게 뭐지?”
*
그 시기 즈음이었다. 예전에 해본 프로젝트와 연계해 프리랜서 작가 겸 책 편집자로 책을 좀 같이 만들어보겠냐는 일이 들어왔다.
아침에는 홍대 한구석의 스타벅스에서 글을 쓰고, 옆 식당에서 밥을 먹고 다시 오후에 스타벅스에서 글을 쓰는 나날이 이어졌다. 자료를 보며 글로 옮기고, 글이 책이 되도록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하고, 교정자를 기다렸다. 마지막에 모두가 모여 피나는 최종교를 보고 나면 손에 잡히는 책이 나왔다. 물속에 반쯤 잠겨있는 평온한 생활이 이어졌다. 그렇게 책이 몇 권쯤 만들어졌을 때였을까.
이때 일을 주셨던 발주처께서 아예 프리랜서로 일하지 말고 이 일로 회사를 설립할 건데 합류하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시작한다면 일은 나름 안정적이고 하려면 잘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미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고민 끝에 정중히 거절했다.
원래도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거나 편집자 역할을 해봤기에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근로의 형태도 자유로웠고 같이 일하는 분들도 따뜻하면서도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 조건이 이렇게 좋았는데도 ‘앞으로 20년간 이 일을 하며 살면 행복할까?’라는 질문에서 쉽사리 그렇다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
책과 책이 발간되는 사이, 가장 달콤한 시기다. 시간은 비었고 통장은 조금 적셔질 예정이다. 당시 종로의 한 독립서점이 나의 아지트였다. 오후에 슬슬 나와 아름다운 책들을 실컷 보고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에는 서점을 찾아온 이들 사이에서 술을 마셨다. 갤러리 지하에서 카메라를 갖고 놀기도 했다(아래 사진처럼) 한량이 따로 없던 나날들 사이에서 나는 또 일을 벌였다.
출발한 생각은 단순했다. 당시 서점을 드나들던, 혹은 내가 알고 지내던 작가들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미지로 표현하는 데는 능숙했지만 글로 생각을 옮기는 일에는 젬병이었다. 술을 마시고 작품에 대해서는 몇 시간이고 떠드는 사람들이 책 맨 앞에 들어가는 <작가의 말>을 쓰는 데는 한없이 작아졌다. 보통 열 줄을 넘지 못하거나 글 같지 않은 글을 써오고는 했다. 어떤 작가들은 대필을 한다. 자기 작품을 남에게 설명을 맡겨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문을 쓰지는 못하겠지만 내 생각을 정확하게 글로 옮기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이런 이들을 대상으로 ‘내 생각을 글로 반듯하게 옮기는 방법’에 대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프로그램의 콘셉트는 ‘창작자를 대상으로 한 글쓰기 모임’이었다.
모임의 이름을 고민하고, 커리큘럼과 인스타그램 계정, 강의자료 등을 만들며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프로젝트와 만남,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지만 “일단 할 수 있는 걸 해보자”라는 생각의 시기였다.
이런 방황을 거쳐 지금 이 순간, 미미가 만든 서비스가 궁금하시다면?
1인도, 100인도 바로 사용 가능한 액티비티 복지몰 서비스 놀리(Nolly)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