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가기
# 다시, 또다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수정과 최종 폴더를 지나야지 완벽한 작업을 마칠 수 있을까. 하나의 작업이 마무리되기까지 수없이 거쳐가는 이전 데이터와 끝을 향해 있지만 도달하지 못해 남겨진 폴더와 레이어들이 작업환경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디자이너에게 수정이란 지극히 당연하며 피할 수 없는 경로다. 그 경로는 때때로 스트레이트 인듯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이 복잡한 미로이며 아무리 돌아가도 다다르지 못할 것 같은 미지의 공포로 가득하다.
그 길은 험난 하나 고지에 도착했을 때 상쾌함을 주는 길이 있는가 하면 시궁창 같은 결과물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현장을 직시하게 돼버리는 날들도 있다. 매 작업, 매 프로젝트마다 우리는 순례의 길을 나선 듯 수정이라는 모험 속을 헤엄치고 있다.
보통 디자이너가 작업에 착수할 때는 기획단계가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거나 확고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온전히 그 결과물이 디자이너에게 귀속된 일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 기획에서 선택된 컨셉과 방향이 있기 마련. 기획자 혹은 마케터들은 그러한 자료, 이미지 즉 레퍼런스를 찾아 디자이너에게 자신들이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달해준다. 하지만 디자인이라는 것이 기계적이게 결과물을 도출하는 과정이 아니다 보니 조금이라도 방향이 어긋나면 전혀 생뚱맞는 작업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 방향이라는 것도 사실은 주관적인 경우가 대다수라 그것을 구체화 단계로 표현할 때 느껴지는 뜻 모를 부딪힘은 계속해서 모든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다.
물론 그것이 쉬운 과정일 때도 있지만 사실은 그 살짝의 변화들은 마치 비버가 집을 지었다 쓸려가고 다시 짓는 것처럼 대단히 수고스럽고 허망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매번 다시, 또다시 겪어야 하는 일들이다. 이제 익숙해졌어 라고 스스로를 다잡는 순간 다시 인생의 회초리로 반대쪽 뺨을 날려버리는 디자인 수정의 세계.
그것은 다 같이 하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입맛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와중에서도 디자이너의 역할과 입장을 다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 모든 과정과 굴곡들이 때때로는 매우 빛을 발하는 날들이 있다. 마치 어미가 어린 자식의 가장 찰나의 아기 시절을 기억하며 나머지 성장 시절의 애정을 채우는 것처럼 그 몇 번의 빛들이 수 없이 많은 탈락의 나날들을 지워주고 버티게 한다.
과정이 중한가 결과가 중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결과가 중하다. 상업미술인 디자인 또한 결국은 결과주의. 잘 팔리면 그만. 하지만 그 뿌리에 있어서 과정이 주는 만족감과 성취감을 배제시킬 수 있을까.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돈이 아니라 낭만인 것처럼 디자이너를 움직이게 하는 것도 결과보단 결국 과정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곳에 들였던 생각과 정성들이 그 길을 지치지 않게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이겠지.
수많은 수정을 하면서 중요한 것은 눈의 환기라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같은 이미지에 열중하다 보면 판단력이 흐려져서 이미지에 대한 감각이 떨어진다. 근거리 작업 중엔 늘 원거리에서의 조율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멀리서 바라보고 집중해야지. 지치지 않고 나아가기 위해선 물과 식량이 필요하다. 언제든지 손에 닿는 곳에 당과 포션을 채워두고 에너지를 비축하자. 무엇이든 다시 하는 건 힘들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것들이 무의미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늘 새기며 진행해야지. 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