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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Sep 27. 2019

나에게 광주는

스무 살 경상도 모단걸이 찾은 광주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는 가난했다. 그 가난한 동네에서도 나의 부모님은 가장 가난한 축에 들었다. 그들의 어깨에는 이미 돌무더기를 한 짐씩 나누어지고 있었다. 계집아이를 대학에 보내는 것, 그것은 그 동네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내아이들까지 통틀어도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동네가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난한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한 내 부모들이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의 고민과 주위로부터 들어야 했던 비난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내 부모의 어깨에 이미 놓인 돌무더기에 같은 양의 돌무더기를 더 얹고서 그렇게 그 동네를 떠났다.  결코 착하지 않았지만 나는 내 부모의 어깨에 놓인 돌무더기에서 조약돌 두어 개를 나누어지고 싶었다. 그랬었기에 장학금을 놓칠 수도 없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놓을 수도 없었다. 낮에는 학교에서, 밤에는 학교 앞 주점에서 일을 해야 했고 쉬어야 하는 틈틈이 연애를 하고, 친구들을 만났다. 스무 살의 나는 분주했다. 


방학이 시작되기도 전에 친구들은 국토대장정이다, 무전여행, 내일로 여행 등을 계획했지만 나는 그들이 부럽지 않았다. 부러움이란 꿈을 꾸는 이들이, 또는 한때 꿈을 꿔본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기에. 스무 살의 첫 방학에 나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했고, 책을 읽고, 친구들을 만나며 분주히 지냈다. 그때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방학이 끝날 무렵 나는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 불현듯 광주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대구에서 광주로 향하는 첫 버스에 오른 것이다. 


가난했던 나의 고향 동네는 생각조차 가난했다.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에 가서 당했던 이야기들은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저마다 들은 이야기라며 토해내곤 했다. 전라도 출신이 대통령이 되자 동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제 우리는 망하게 되었다며 근거 없는 공포를 우리에게 주입하기도 했다. 나의 머릿속 한 켠에도 스무 해 동안 내 귀를 스쳐 지나간 전라도에 대한 공포가 아주 작지만 끈끈하게 스며들어 있었을 것이다. 88 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로 향하는 내내 나는 불안했다. 경상도에서 태어나고 자라, 경상도 밖으로 나간 본일이라고는 고작 몇 번의 서울구경이 전부였으니, 그때 광주로 향하는 버스 창밖에서 마주하는 초록빛의 풍경도 낯설었다. 


혼자서 광주를 다녀오고 광주가 어땠냐고 묻는 주변인들의 질문에 나는 잘 모르겠다는 애매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주변의 경상도 사람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날의 광주는 너무 초라했다.



 부끄러웠다. 내가 본 광주는 포항보다 작은 것 같았다. 광주 사람들이 어땠는지, 그들이 정말 경상도 사람들을 적대시하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내가 광주 터미널에 내려서 마주한 광주의 모습에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전라도에서는 광역시가 경상도의 일개 시보다 더 낡은 것 같은 모습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왜 사람들이 그다지도 지역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살고 있는 산골 동네에는 이미 90년대에 초에 시멘트 포장길이 다 깔렸음에도 그쪽에는 그때까지도 비 포장된 시골길이 많다는 게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한 순간이었다고 할까. 그날 밤 대구로 돌아오는 버스 창에 기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몇 번의 한숨을 쉬었었을까. 스무 살의 나는.


광주를 다녀와도 변한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장학금에 목숨을 걸었고,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틈틈이 연애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 헤픈 웃음을 터트리는 일상을 이어갔다. 가끔 광주의 그 좁은 길거리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가 있었다. 대구시내에 새로운 건물이 올라갈 때, 도로를 확장할 때, 지하철이 개통될 때. 아르바이트비를 받아 동생과 함께 간 고깃집에서 무성의한 밑반찬을 볼 때, 광주의 시내를 걷다 들어간 백반집에서 마주했던 테이블을 가득 채웠던 넉넉한 반찬들을 아주 잠깐 생각했다. 


스무 살의 용감했던 나에게 광주는 그랬다. 

좁은 도로가 이어지던 도시의 왜소한 중심가와 너무 푸짐해서 괜스레 미안해지던 백반집. 





사족) 지금의 내 고향 동네는 더 이상 지역감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미 세 번이나 이루어진 정권교체 체념한 것인지, 그들이 원하는 정권과 다른 정권이 들어서도 '우리'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불과 이십여 년이 지났을 뿐인데 꿈을 꾼 것만 같다. 


몇 번의 전라도 여행을 다녀온 부모님께 장난스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땠어?"

그러면 우리 아빠는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어떻긴 뭐가 어때! 근데 뭐긴 멀더라"

그는 알고 있을까? 그들은 원래부터 가까웠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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