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합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넘어가던 어느 날, 강아지들과 산책을 하다 생활체육공원에 걸린 현수막 하나를 발견했다.
‘xx동 여성축구회 회원 모집’
당시 나는 퇴근을 하면 한낮의 열기를 그대로 품고 있는 바람을 맞으며, 뛰다 걷다 하는 러닝인 듯 러닝이 아닌 러닝에 푹 빠져있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는 ‘골 때리는 그녀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다 진심으로 운동을 하는 그녀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경험도 있었다. 그럼에도 축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결코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은 회원이면 어쩌지, 완전 초보라서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곧 마흔이지만 뭐 어때, 나는 무더운 날에도 삼십 분씩은 달리기를 하고 있었고, 공을 차 본 적은 없지만 수영도, 요가도, 자전거도, 배드민턴도 이내 배워내지 않았던가. 도둑질도 아닌데, 뭐든 배우면 좋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 나는 바로 휴대전화에 현수막에 있는 번호를 저장했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내 답장이 왔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가 시행 중이라 지금은 운동을 하지 않지만 단계가 내려가고 운동이 가능해지면 연락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달간 잊고 있던 여성축구회에서 드디어 연락이 왔다. 11월의 마지막 주였다. 퇴근 후, 강아지들 산책을 마치고 가볍게 러닝을 하고 축구장으로 나갔다. 축구화를 신어 본 적도 없고, 진짜 축구공은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다들 오랜만에 운동을 해서인지 많은 회원들이 나와있었다.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은 다양했다. 다들 신입회원을 기쁘게 맞아주셨다. 축구화가 없기 때문에 러닝화를 신은 채로 나는 함께 준비운동을 하고, 인사이드 패스를 연습했다. 생각보다 축구공은 딱딱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공을 차는 일은 무척 재밌었다. 배운 대로 공을 차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다 풀렸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공이 굴러가는 것도, 공을 띄울 의도가 없었음에도 공이 붕 뜨는 것도, 상대방이 차 준 축구공을 세우지 못해 축구장을 가로질러 뛰어다니는 것도 신나는 일이었다.
고백하자면, 운동에 무식한 나는 공하나를 가지고 뺏고 빼앗기는 축구는 별다른 기술이 필요 없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비하면 두뇌싸움이 보이는 야구가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투수와 타자, 경기의 흐름을 읽어내야 하는 포수와 각 루를 밟고 선 주자 간의 숨 막히는 두뇌싸움이 보는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야구야말로 정말 즐길 가치가 있는 운동이며, 그에 비해 공하나를 뻥뻥 차기만 하는 축구는 지루한 운동이라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무식에 기반한 편견이었는지는 축구공을 직접 차 보고서야 깨달았다. 공을 다루는 기술은 무척 어려웠고 정교해야 했으며 선수는 열심히 뛰는 와중에 경기의 흐름을 읽고 있어야 했다. 빨리 공을 패스할 선수를 찾아야 했고, 정확히 공을 패스해야 했으며 상대 선수들의 특기와 특징을 알고 있어야 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이상, 러닝 복장은 생각보다 가벼워야 한다. 뛰다 보면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기 때문에 모자와 장갑, 양말만 단단히 두꺼운 것으로 무장하고 긴팔의 드라이핏 기능이 있는 티셔츠 하나에 조끼, 러닝용 타이즈가 전부였다. 첫날, 나는 축구장 밖에서 출전하지 않은 다른 선수들과 인사이드 킥을 연습했다. 아무래도 직접 뛰지 않다 보니 얇은 러닝 복장만으로는 이내 땀이 식어 온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결국 첫날에는 인사이드 킥 연습을 하고, 시니어 축구클럽과의 경기에서 여성축구회가 4대 1로 이기고 있는 것만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따듯한 물을 받아놓고 반신욕을 하면서도 나의 흥분은 쉽게 식지 않았다. 단단한 축구공의 감촉이 여전히 내 발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몇 번의 연습을 함께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 여성축구회에는 전직 축구선수들도 있고, 10년 이상 축구를 한 분들도 많았고, 발톱이 안 빠져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들 축구에 진심이었다. 축구화가 없는 나에게 본인의 낡은 축구화를 선뜻 빌려주신 회원 덕분에 이제 나는 축구화를 신고 축구를 한다. 아직은 경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 채로 단순히 공을 따라 뛰고, 어쩌다 공이 나에게 오면 인사이드 킥으로 한 두 번 차보는 게 전부이지만 매주 축구하는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이제까지 내가 해본 운동 중에 축구가 가장 재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축구 경기의 규칙도 잘 모르지만, 도저히 내가 잡을 수 없는 축구공을 따라서 죽도록 뛰다 보면 온 허벅지가 당기고 한겨울에도 머리카락이 다 젖을 정도 땀으로 범벅이 되고 고통스럽도록 숨이 가빠진다. 숨이 가쁘고 허벅지가 너무 아파 축구장에 드러눕고 싶어 지지만 그래도 내 두 다리가 쉬지 않고 부지런히 축구장을 달리면 내 머릿속에 가득했던 잡념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운동이 끝나고 한 손에 낡은 축구화를 넣은 가방을 들고, 젖은 머리카락이 찬 바람에 딱딱하게 얼어붙어 온 몸이 오들오들 떨리도록 추워도 집으로 가는 길, 내 두 다리는 어느새 무거워졌지만 운동을 시작하기 전 내 머릿속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던 고민들은 어느새 차가운 겨울바람에 실려 축구장 어딘가에 굴러다니게 두고 상쾌한 기분만 가지고 가는 것이다. 이제 겨우 세 번 축구를 했지만, 축구장을 뛰어다닌 시간보다 축구장 밖에서 패스 연습을 한 시간이 길었지만, 날씨가 더 추워지면 축구를 하기가 힘들겠지만 나는 정말로 축구에 푹 빠졌다. 이제껏 나는 함께하는 운동보단 혼자 할 수 있는 러닝이나 요가, 수영, 자전거 등의 운동이 나에게 맞다고 확신했는데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함께 공을 차다 보니 나는 어떤 운동이든 즐기며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깨달았다. 이제 축구화를 새로 사야 하고, 신가드(정강이 보호대)를 비롯한 양말도 사야 하지만 이 얼마나 즐거운 쇼핑이란 말인가!
내가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운동을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축구장에서 신나서 뛰어다닐 수 있을까. 학창 시절 체육시간이면 남자아이들은 자연스레 운동장을 가로질러 축구를 하고, 여자아이들은 운동장 한편에서 발야구를 했던 기억이 있다. 축구를 시작하고 나서야 내가 가장 신나게 뛰어놀 수 있던 학창 시절에 축구를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 이제야 새삼 억울하고 분한 것이다. 이제라도 축구의 재미를 알게 되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학창 시절에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축구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실에 분풀이를 하듯, 여성축구회에 있는 60대 회원분들처럼 정말 골대에 골 때리게 될 때까지 골 때리는 여자가 되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