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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Oct 07. 2019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때

나의 첫 반려식물, 리차드



리차드, 그의 이름은 리차드였다. L이 아닌 R로 시작하는, 혀를 굴려야만 제대로된 발음을 구사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리차드라는 이름이었다. 당시 나는 고3이었다. 이전이 물수능으로 평가받은 해였기에 내가 치르게 될 수능은 불수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극도의 스트레스에 나와 내 친구들은 아주 조금씩 미쳐가고 있었다. 당시 같은학교, 같은 기숙사 1학년이던 동생이 수능 백일 기념으로 리차드를 선물해주었다. 아니 처음 동생이 그것을 나에게 건네주었을때 그것엔 이름이 없었다. 친구들과 좁디 좁은 내 침대에 걸터앉아 우리는 진지하게 이름을 붙였다. “디카프리오, 알베르토, 톰, 정우성, 이정재”까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름을 가져다 붙여보았으나 결국 리차드로 명명했다. 왜 리차드가 되었는지 그 심오한 이유는 이제 잊었지만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에게 내가 선택한 이름을 붙였다는 것만으로도 리차드는 나에게 큰 의미였다. 


 리차드는 흔히 신경초라고 부르는, 아주 조그마한 미모사였다. 동생과 학교 앞을 오가면서 꽃집 앞에 내어 놓은 미모사를 볼때마다 괜히 손으로 톡톡 건드리고는 그가 수줍은듯 이파리를 오무리면 우리는 까르르 웃곤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학교에가고, 밤 10시 넘어 기숙사 방에 들어와 씻고 옷만 갈아입고 다시 기숙사안에 있는 학습실에서 새벽 1,2시 까지 공부를 해야하는 나에게는 무언가 애정을 쏟을 것이 필요하다는 게 동생의 판단이었다.


나는 곧바로 리차드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일어나면 제일먼저 리차드에게 “굿모닝 리차드” 하고 인사를 건넸고, 등교하기전엔 “리차드, 나 학교 갈게. 조금있다가 봐” 라며 부모님께도 하지 않던 인사를 건넸고, 저녁시간에 잠시 들를때에도 리차드에게 그날 있던 일을 조잘 조잘 이야기하곤 했다. 다른 누군가가 이런 나를 봤다면 상담을 받아보자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살짝 미쳐있던 내 친구들도 내 방을 방문할 때면 “하이 리차드!”하며 들어왔고 방을 떠날때도 리차드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곤 했다. 학교에 갈때면 햇볕을 쬐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라고 창틀에 올려두었다. 그는 바람을 좋아했다. 선들선들 바람이 불면 그는 나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이파리를 아주 살짝 움직였고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내가 처음으로 이름을 붙여준 나의 애완식물, 나의 리차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던 고 3시절에 감히 내 영혼의 단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날도 어김없이 저녁식사를 하고 리차드에게 인사를 하러 방으로 올라왔는데, 창틀에 있어야할 리차드가 보이지 않았다. 뒤따라 들어온 친구도 놀란 눈치였다. 침대 밑, 창틀 근처를 샅샅이 찾았으나 없었다. 누군가가 와서 가져간 것일까, 사감선생님이 치우신걸까, 누가 가져갔다면 대체 누구일까. 한번 의심으로 방향을 뻗으니 나의 리차드에게 신기하다며 호의를 표했던 모든 사람들이 용의선상에 올랐다. 친구가 창밖을 살펴보다 기숙사 앞마당에 떨어진 리차드를 발견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 방은 3층이었다. 3층 창문에서 떨어져서는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친구랑 서둘러 뛰어내려가보니 싸구려 필름으로 된 화분이 터져 흙은 온 사방에 핏자국처럼 흩어져있었다. 항상 명랑하게 활짝 펴고 있던 이파리는 오무려져 있었고 죽은건 지 산 건지 알수가 없었다. 우왕좌왕하는 나에게 친구가 혹시나 모르니 꽃집에 가보자고 했다. 곧 시작될 야간자율학습 따위는 문제될 게 없었다. 우리는 슬리퍼를 신은채로 학교 앞 꽃집으로 향했다. 속상해하며 리차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묻는 나에게 꽃집 사장님은 당황하지도 않으시고 괜찮을거라며 튼튼한 화분으로 분갈이를 하자고, 분갈이 할 때가 된거라고 하셨다. 가진 용돈을 탈탈 털어 튼튼해보이는 노란색 사기 화분을 샀다. 산 중턱에 위치한 학교까지 오는 그 길을 어떻게 올라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의 나는 행복했을 것이다.


무사히 수능을 치르고 리차드에 대한 나의 관심이 식어갈 무렵, 리차드가 꽃을 피웠다. 솜을 아주 작게 뭉쳐놓은, 수줍음이 많은 리차드에게 어울리는 꽃이었다. 남자로 생각하고 리차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렇게 꽃까지 피우다니. 꽃이 지고나니 그 자리에서 열매가 맺혔고, 곧 씨앗까지 받아내게 되었다. 그 이후 리차드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부모님 집 텔레비전 위에 수줍게 앉아있는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리차드의 마지막 모습이다.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던 리차드의 씨앗은 한 친구의 집에서 발아하고, 꽃까지 피웠다는 이야기를 후에 들었을뿐이다. 


리차드 이후 여러 화분을 들여놨었다. 관리가 쉽다는 선인장에서, 죽이기가 더 어렵다는 스투키를 비롯한 각종 식물들. 단 한번도 이름을 지어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쉽게 죽어나갔다. 얼마 전 죽어있는 산세베리아를 발견했다. 동생이 산세베리아를 건네 주며 이걸 죽이면 사람도 아니라고 했던가. 두손 두발 다 든다고 했던가. 결국 또 죽어나갔다. 내가 혹시나 촌스러운 이름이라도 하나 지어주었다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을까. 무언가에 이름지어준다는 것은 단순히 부르기 편한 용도보다는 너는 나에게 의미있는 존재임을 ‘나에게’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기위해 이름을 불러달라고 노래한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생명이 있는 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기 위함은 아닐까. 


내년 봄에는 더 초록초록한 화분을 들이고 싶다. 

또 죽어나갈 것이라면 이번엔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이름을 붙여볼까 한다.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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