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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Mar 08. 2020

분리불안이 뭐냐개

세상에 버려져도 되는 생명이란 없다.



얼마 전, 인터넷을 검색하다 강형욱 훈련사가 진행하는 ‘개는 훌륭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키우던 반려견과 이별한 반려인의 만남을 주선하는 ‘개는 사랑을 싣고’라는 내용을 방송한다는 기사를 봤다. 만약 내가 봄이의 이전 보호자를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까, 봄이는 그들에게 어떤 눈빛을 보여줄까. 나는 진심으로 그들이 평생 고통을 받았으면 좋겠다. 추운 겨울 동안 길거리를 떠돌며 추위와 배고픔에 고통받았고, 보호자를 기다리느라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구조 당시 겨우 890그램에 불과한 강아지를 그 거리에 버려뒀을 보호자에게 어떠한 사정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뿐더러, 그 어떠한 사정이었든 그들이 우리 봄이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면 나는 그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테니까. 만약 그들이 봄이가 나를 만나기 전 몇 달 동안 길거리를 떠돌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차마 상상할 수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려견을 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강아지에게 미쳐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저 내 일상생활을 하고 그런 내 삶에 강아지를 가족으로 맞이했을 뿐이다. 나는 강아지에게 내 모든 정성을 쏟는 사람도 아니다. 내 반려견이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굳이 아프지 않더라도 주기적으로 병원 진료를 받고, 배고프지 않게 밥을 주고, 매일 산책을 하고, 매일 함께 잠들고, 아이들이 나를 신뢰하기를 바라고, 이전 보호자에게 버림받은 기억을 조금이라도 지울 수 있도록, 더 이상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안정감을 줄 뿐이다. 유난을 떠는 보호자가 아닌, 보통의 반려인인 나에게도 ‘개는 사랑을 싣고’라는 포맷은 충분히 분노를 하게 했다. 이 세상에 버려져도 되는 반려견이란 없으니까, 이 세상에 가족으로 받아들인 반려견과 함께 살지 못하는 이유 따위는 없으니까.


복길이는 내가 스물두 살, 동생이 스무 살 때 충동적으로 입양한 아이 었다. 이제야 고백하자면 나와 동생 둘 다 강아지를 입양하면 안 되는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린, 강아지가 적응을 하지 못해 파양을 하게 되었다는 그 글을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복길이를 입양하기로 했다. 우리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때부터 우리 집에는 항상 강아지가 있었고, 강아지가 없는 삶이란 생각하지 못했던 터였기에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입양을 했다. 복길이는 예민한 강아지였고, 배변 실수는 죽는 그때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나는 복길이를 입양하고 복길이의 페이스에 맞춰갔다. 아마 그녀도 나의 페이스에 맞춰갔으리라. 우리는 함께 반려견, 반려인으로써 성장해갔다. 복길이는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나의 용감한 여전사였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던 무렵에 길거리를 떠돌던 봄이를 구조했다. 봄이는 복길이와 달리 오자마자 패드에 배변을 했고, (복길이는 패드보단 바닥을 선호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패드는 구비해두었더랬다.) 앉아, 기다려, 손 같은 기본적인 훈련이 되어있는 아이 었다. 이 아이가 왜 버려졌을까 했으나 심잡음이 들린다는 동물병원 원장님의 진료 결과에 이 아이가 버려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1킬로도 되지 않았던 봄이와 예민 보스인 복길이는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 복길이는 봄이에게 시비를 자주 걸었고, 그 수만큼 뒤엉켜 싸웠다. 새벽 두세 시에도 둘은 엉켜서 싸웠고 그런 날이면 싸움을 말리느라 벌건 눈으로 출근을 했다. 나는 거의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퇴근하면 봄이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고, 상처가 있으면 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결국 1년이나 지속된 싸움은 계속 져주던 봄이의 반격으로 복길이가 더 이상 봄이에게 시비를 걸면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은 뒤에나 끝났다. 그 후로 둘은 내색은 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봄이가 아프거나 복길이가 아파서 수술을 받으면 가까이에서 핥아주고, 대신 낑낑거렸으며, 심지어 화장실도 함께 갔다. 아마 복길이가 떠나기 전, 거짓말처럼 상태가 좋아졌던 것도 마지막으로 봄이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서 마지막 힘을 다 짜낸 것은 아니었을까.


봄이를 입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집에서 쪽지를 받았다. 강아지가 내가 없는 낮시간에 계속해서 짖고 운다는 것. 복길이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기에 당황했다. 당시 우리 앞집 부부에게 갓난아이가 있었는데 봄이가 낮에 계속해서 짖고 우는 일 때문에 아이가 자꾸 깬다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사과했고, 앞으로 그러지 않도록 교육을 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봄이에게 분리불안이 있다는 것, 그것에 대한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스트레스였다. 오죽했으면 짖음 방지 목걸이를 살까 하는 잔인한 생각까지 했을까.(지금도 그때 내가 짖음 방지 목걸이를 생각했다는 그 사실이 너무 부끄럽다.) 그때 내가 도움을 받았던 것 중에 하나가 강형욱 훈련사의 방법이었다. 잠깐 현관 밖에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오는 것, 그 시간을 점점 늘려가는 것. 그 훈련의 키 포인트는 보호자가 밖에 나갔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었다. 과연 그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사라지자마자 짖고 울부짖던 봄이는 반복 교육을 통해 한참을 지나도 더 이상 짖지 않았다. 부수적으로 그 일로 나는 앞집 새댁과 친해져서 내가 퇴근하고, 그녀의 남편이 퇴근해 그녀를 대신해 아이를 보면, 그녀는 우리 집에 건너와 함께 수다를 떨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지금 봄이는 분리불안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가 되었다. 내가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그녀는 침대에 누워 늦잠을 즐긴다. 간식으로 그녀를 유인하면 잠깐 거실로 나와 간식을 먹고 다시 침대로 올라간다. 가끔은 가장이 돈 벌러 가는데 현관에 나와 배웅을 해주면 할 때도 있지만, 이 또한 그녀가 나에 대한 신뢰를 쌓았기에 가능한 일이라 감사하다.


최근 봄이와 나는 꽃님이라는 강아지를 우리 가족으로 맞았다. 꽃님이는 강아지 공장 출신으로 추정되는 아이다. 잦은 출산으로 고관절이 벌어졌고, 슬개골 3,4기로 발견되어 안락사를 기다리던 아이 었다. 포인핸드를 통해 시골 보호소 강아지를 보던 와중에 꽃님이 사진을 보고 연락을 했더니 이미 입양이 되었다고 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한 유기견 구조단체에서 올린 입양 목록에 올라온 그 아이를 보고 입양신청서를 제출했고, 내가 입양자로 선정되었다. 그렇게 몇 달 전 입양을 하기로 했는데 임보자가 본인이 입양을 하고 싶다며, 입양 결정이 나고 며칠 동안 눈물로 생각해본 결과 다시 새로운 환경에 보내기 마음이 아프다며 나에게 조심스레 그 뜻을 전달했고, 나 또한 꽃님이를 아껴주는 사람에게 입양 가는 것이 좋겠다 하여 입양을 포기 했었다. 그렇게 꽃님이를 잊고 있었는데 불과 얼마 전 다시 입양 목록에 있는 꽃님이를 발견하고 화가 나서 연락을 했더니, 꽃님이에게 심장병이 있다며 파양을 했다고 했다. 나는 몹시 분노했다. 얼마나 욕을 했던지, 망할 년이라고 미친년이라고 천하의 썅년이라고. 입양을 포기하겠다고 했을 때, 감사하다고 꼭 잘 키울 거라고 나에게 말했던 너는 꼭 유병 장수해야 할 것이라고 욕을 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나와 봄이는 꽃님이를 입양했다. 아직 봄이와 꽃님이는 데면데면하고, 꽃님이는 꼭 내 침대 근처에만 똥을 싼다. 자기 침대 근처에는 절대 싸지 않으면서 말이다. 굳이 내가 보는 앞에서 오줌을 싸고 나서는 꼭 내 눈치를 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아무 말 없이 치우고 있으면 금세 소파에 올라가 코를 골며 잠을 잔다.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은데 눈치 없는 꽃님이가 내 스타일의 성격이라 나는 그것도 좋다. 심장병이 있지만 아직 약을 먹어야 하는 수준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경과를 추적하면 되는 일이라 그 또한 힘들 것이 없다.


이 세상에 버려져도 되는 생명은 없다. 그리고 함께하지 못할 반려견은 없다. 나는 그것을 복길이와 봄이를 통해 배웠다. 나는 완벽한 반려인은 아니다. 나의 반려견들도 완벽한 반려견은 아니다. 세상에 완벽한 반려견과 반려인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사이에 조화를 함께 찾아가는 일, 그게 가족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개는 사랑을 싣고’ 포맷이 불편하다. 반려인에게 피치 못할 이유가 생긴다면 반려견과 이별을 해도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지는 않을까. 내 가족을 버린, 파양범들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는 것이 되어버릴까 봐. 이런 아이디어는 대체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며, 이런 범죄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방송을 진행한다는 것이 공영방송으로 가당키나 한 것인지 화가 난다.


어떤 이들에게는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알레르기가 있다거나, 경제적으로 어렵다거나, 가족 중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거나, 강아지 생의 끝까지 책임질 자신이 없다거나. 그런 사람들은 강아지를 키우지 않으면 된다. 단순하다.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이유가 하나라도 있는 사람은 키우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미 강아지를 내 가족으로 맞이한 사람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가족을 버려도 되는 이유란 없다. 내가 생각하는 피치 못할 이유란 내가 죽는 것 말고는 없다. 만약 이러한 경우라면 나는 내 남은 가족들에게 내 반려견들의 남은 생을 부탁할 것이다. 그러므로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한다. 당신은 강아지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당신의 반려견은 당신이 없다면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 이것만은 반드시 기억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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