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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May 05. 2020

까짓것 좀 찌면 어때?

먹는 게 너무 좋은 걸 어떡하라고



PT를 받은 지 6개월 차, 그동안 내 몸무게는 단 1킬로그램이 빠졌을 뿐이다. 처음 운동을 시작하고 트레이너의 요구대로 하루에 물을 2.5리터 이상 마시고, 식단을 조절하자 일주일 만에 3킬로그램이 빠졌을 때 나는 왜 이제야 PT를 받은 것인지 후회를 했었다. 그렇게 서른 살 때의 내 몸무게로 회복하는 일이 요원하지 않아 보이던 시점에 나는 방심했다. 그동안 요가, 수영, 자전거, 필라테스까지 각종 운동을 섭렵했지만 개인 트레이너와 함께 운동하는 지금에 비하면 모든 게 장난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자 나는 나태해졌다. 그동안 끊었던 배달음식을 야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이유로, 주말 하루 정도는 괜찮다며 먹어대기 시작했고, 생리를 앞두고는 자연의 섭리라며 배달 어플을 켰다. 결과는 지금 이렇게 처음과 다름없는 몸무게가 되었다. 하아,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먹을 것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열정은 그러니까 아무래도 나의 가정환경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1남 3녀의 맏이다. 어린 시절 풍족하지 않았던 가정환경 탓에 과자나, 빵 등 평소에 먹기 힘든 주전부리가 생기면 나와 동생들은 서로에게 빼앗길세라 입에 구겨 넣기에 바빴다. 내가 지금 컨디션이 좋지 않아 먹지 않는다면 다음은 없다는 것, 동생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 혹시 각자의 몫으로 정확히 나누더라도 아껴먹는 나와는 달리 먼저 제 것을 먹고 나서 내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탐하는 동생들이 있다는 것, 억지로 밀어 넣어 토하더라도 동생들에게는 주기 싫다는 것. 흔히 맏이에게서 기대하는 양보라는 미덕은 나에게 없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을 키워온 것은 아닐까. 


고등학생 때였다. 당시 나는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2주에 한 번씩 집에 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보통 집에 도착하면 나는 옷도 벗지 않고, 큰 양푼이를 꺼내 냉장고에 있는 각종 나물들을 넣고 비벼먹는 것으로 집에 온 것을 실감하였는데, 그날도 나만의 비빔밥을 만들어 티비를 보며 본격적으로 먹으려고 하는데 엄마가 숟가락 하나만 달랑 들고 나에게 돌진했다. 당황한 나는 “먹지 마! 내가 만든 거야!” 입안에 있던 밥알이 튀어나오게 소리를 질러댔고 서둘러 양푼을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흠짓 놀라더니 이내 숟가락을 나에게 던지며 외쳤다. “안 먹어 이년아! 니 혼자 배 터지게 처먹어!” 엄마의 손에 숟가락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맛있게 비빔밥을 먹었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은 내가 먹는 음식에 내 허락 없이는 손을 대지 않는 미덕을 갖게 되었다.


대학교 때 사귀던 남자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그는 내 컴퓨터로 게임을 하고 있었고 나는 티비를 보고 있었는데 티비에서 빵이 나왔고 나는 이내 빵이 먹고 싶어 졌다. 게임에 정신이 없던 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오빠 나 빵 먹고 싶어.” 그는 “응”이라고 짧게 대답하고 게임을 계속했고, 나는 한 번 더 “오빠 나 빵 먹고 싶다고오오”라고 말했으나 게임에 정신이 팔린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는 게임을 끄고 내게 다가왔다. “너 왜 울어?” 나는 울면서 말했다. “나 정말 빵이 먹고 싶다고! 진짜 빵이 먹고 싶다고!” 그는 바로 집 앞 슈퍼로 뛰어갔다. 그리고 보름달 빵과 소보로 빵을 사들고 왔다. 내가 먹고 싶었던 것은 파리바게트 소보로였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눈물이 번진 얼굴에 미소를 띠며 나는 그가 사 온 빵을 먹었다. 그는 헤어질 때까지 내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바로 찾아봐주는 친절한 남자 친구가 되었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하느라 나는 항상 재정적으로 부족했는데 그래도 먹고 싶은 것은 참지 못했기에 동기들이 용돈 받는 날은 기억해두었다가 적절히 이용했다. 동기 중 J군이 주로 타깃이었는데 그가 용돈을 받는 날은 동아리방에서 그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나타나면 그를 졸랐다. “야, 찜닭 먹고 싶지 않냐? 너 지금은 안 땡겨도 한 시간 뒤에는 땡길거야. 그러니까 지금 시키자.” 그럼 그는 이내 “그럴까? 나 오늘 용돈 받았지롱!”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나는 그를 이용해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을 맘껏 먹을 수 있었다. 하루는 그와 내 남자 친구, 나 이렇게 셋이서 동아리방에서 놀고 있는데 남자 친구와 그가 저녁을 먹자며 중국집에 전화를 했다. 나는 외쳤다. “난 짬뽕!” 그런데 그 두 놈이 메뉴 두 개만 시키고 전화를 끊는 게 아는가. “난 짬뽕이라고! 왜 내껀 안 시켜?” 그가 말했다. “야 너 돈 없지? 이거 더치페이야.” 사실 짬뽕을 먹을 돈이 없었지만 이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또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들은 다시 중국집에 전화해서 짬뽕을 시켰다. 그 이전부터 동기들 사이에서 나는 심상치 않은 녀석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 사건 이후 나는 ‘미친년’이라는 다소 격한 수식어를 갖게 되었다. 


무엇이든 복스럽게 먹는 나를 볼 때마다 동생은 시니컬하게 말한다. “언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 알지? 언니를 볼 때면 그게 아닌 것 같아. 언니는 차곡차곡 독에다가 채우잖아. 그리고 그 독을 튼튼히 하려고 운동하는 거지? 언니는 참 신기해. 먹느라 통장 조지고, 그래서 찐살을 빼겠다고 운동한다고 또 통장 조지고” 내가 좀 덜 먹는다면 나는 지금보다 조금은 부자이지 않을까?


배우 옥주현이 그랬다지. ‘먹어봤자 내가 아는 그 맛이다’ 매일 아침 체중계에 올라갈 때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떠올린다. 어젯밤에도 나는 먹어봤자 내가 아는 ‘그 맛’을 느꼈고, 아침이 되면 죄책감을 느끼며 다시금 다이어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다. 단 하루도 지속되지 못할 열정을 아침마다 되새기며 출근하면 나를 맞이하는 다양한 방면에서의 스트레스에 다이어트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든 채로 퇴근하여 또다시 내가 아는 ‘그 맛’을 복습하기 위해 배달 어플을 켠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입에 넣음으로써, 나의 위장이 불룩해짐으로써 나는 잠깐 행복해진다.  ‘까짓것 살 좀 안 빼면 어때, 내가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그러나 이내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젠장 트레이너에게 뭐라고 하지. 나는 안돼. 틀렸어. 이렇게 매번 당장 기분 좋은 무언가를 찾다가 이렇게 살고 있는 나를 보라고!’ 죄책감에 잠자리에 들고, 다시 내일 아침이면 체중계에 올라서 ‘먹어봤자 내가 아는 그 맛이다’를 되뇌며 하루를 시작하겠지. 겨우 하루도 가지 않은 다이어트에 대한 열정을, 먹을 것에 대한 열정으로 덮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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