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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Jan 25. 2021

언제든, 언젠가는 다시 아리산!

오래전 아리산 여행기를 지금 다시. 1




기차를 잘못 탔다. 이번 여행의 목적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아리산 일출을 보기 위해 아리산에 가려고 30분 전에 나는 타이난에서 중간 목적지인 자이로 가는 기차를 탔었다. 자이에서 아리산을 가는 마지막 버스는 2시 10분. 나는 12시쯤 자이에 도착하기 위해 타이난의 호스텔에서 일찌감치 체크아웃을 하고 기차를 탔는데, 30분쯤 지나자 기차에 있던 모든 사람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30분을 더 가야 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앉아있는데 안내 방송이 나온다. ‘라스트 스테이션’ 어랏? 왜 라스트 스테이션이지 하며 창밖을 내다보니 가오슝이라고 쓰여있었다. 가오슝이라면 이틀 전 내가 이미 떠나온 도시가 아닌가. 잠시 멍해진 나는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깐 멍을 때리다가 한국인 특유의 발빠름으로 가오슝 역의 안내데스크로 달려갔다. 서툰 영어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내 표를 보여주며 안내데스크 남자에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타이난에서 자이로 가는 표를 끊었는데 아무래도 기차를 잘못 탄 것 같아요. 어떡해야 하죠?”

내 표를 흘깃 본 직원이 말했다.

“아, 그러네요. 그냥 다음 기차 타고 가세요.”

아, 이토록 쉬운 일이었다니. 직원이 내 표에 다음 기차 시간과 플랫폼 번호, 자이 역에 도착시간을 적어주었다. 그가 적어준 자이 역 도착 예정시간은 2시 7분이었다! 나는 2시 10분에 자이 역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아리산행 버스를 타야 하는데 어떡하나.

“선생님. 제가 2시까지는 자이 역에 도착해야 해서요. 정말 급한데 다른 기차는 없을까요?”

“아이고, 아가씨가 여기서 말하는 동안 기차가 떠났네요. 지금으로서는 2시 7분에 도착하는 기차가 제일 빠른 기차예요.”


어쨌든, 나는 추가 요금을 내지 않고 다시 기차를 탈 수 있으니, 자이 역에 가서 미친 듯이 뛰면 버스를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직원이 알려준 플랫폼으로 갔다. 혹시 몰라 옆에 서있는 사람에게 자이에 가는 기차를 타려면 이 플랫폼이 맞는지 한번 더 확인했다. 


기차가 도착했다. 빈자리가 많아 다행히 앉을 수 있었다. 나는 배낭을 선반에 올려놓지도 못한 채 한껏 긴장해서 창밖을 주시했다. 이틀 전에 떠나왔던 가오슝을 나는 오늘도 떠난다. 젠장. 기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손에 표를 든 채 나와 자리 번호를 번갈아 본다. 아, 이 자리 주인이구나! 서둘러 일어서려고 하는데 이 남자가 그냥 앉아있으라며 내 옆에 앉는다. 매끈한 영어만큼이나 얼굴도 매끈했다. 여행은 언제나 계획과 우연의 교차이다. 대만에 도착해서 오늘 아침까지는 '계획'한대로 흘러왔지만, '우연'이 끼어들면서 이 남자를 만난 것이다. 이런 우연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호주에서 살고 있다는 그는 나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에게 오늘 아침 상황을 설명하면서 자이 역에 도착해서 아리산행 버스를 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본인이 자이 출신이라며 지금 자이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아리산행 버스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겠다고 했다. 하아, 매끈한 영어에, 얼굴도 매끈한 이 남자는 성격도 매끈했다. 한참을 친구와 중국어로 이야기하던 그가 알려주었다. 아리산행 버스가 많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 우리는 자이 역에 도착할 때까지 쉴 새 없이 대화를 이어갔고 각자의 페이스북 아이디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자이 역에 내렸다. 


중간 목적지인 자이 역에 내리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동안 긴장하느라 화장실을 못 갔는데 나에겐 현지인이 알려준 고급 정보가 있으므로 (아리산행 버스가 자주 있다는) 기차역 화장실로 가 천천히 볼일을 보았다. 여전히 나는 서두르지 않은 채로 기차역사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자이 역을 나와 아리산행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으로 갔다. 아주 작은 티켓 부스 앞에 서서 말했다. 

“아리산 행 버스 티켓 한 장 주세요”

“아리산 마지막 버스는 이미 출발했습니다.”

“네? 뭐요? 왜요? 마지막 버스가 몇 시였는데요?”

“2시 10분이요.”


하아, 여행은 언제나 계획과 우연의 교차라고? 얼마나 많은 우연이 나의 대만 여행길 앞에 놓여있으려나. 매끈한 영어를 구사하고 얼굴과 성격이 매끈한 그는, 그리고 자이에 살고 있는 그의 친구는 왜 내게 거짓 뉴스를 알려주었나. 내가 그리 바보 같아 보였나.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오늘은 아리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타이베이로 떠나기로 했던 나의 여행 계획에서 어떤 부분을 수정해야 할까. 넋이 나가 무거운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지도 못한 채 버스정류장 한가운데 서있던 나에게 한 할머니가 중국말로 시끄럽게 이야기하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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