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복스럽게 잘 먹던 과거의 내가 괜히 그립다. 동생과 단 둘이서 삼겹살집에 가면 일단 4인분을 주문해서 먹고, 추가로 3인분을 주문해서 먹다가 고기가 다 떨어져 갈 무렵이면 된장찌개와 냉면을 하나씩 주문해서 싹싹 비우고 오던 나는 요즘 소화가 잘되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 저녁은 요거트나, 삶은 계란으로 해결한다. 티브이에 나온 온갖 맛있는 음식들을 시켜먹으면 그다음 날은 소화제를 챙겨 먹어야 한다. 그래도 소화가 안되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쯤 되면 나는 우울해지고 마는 것이다. 아, 나의 장기도 나처럼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정말 나는 나이를 먹었구나. 산해진미도 나에겐 무용한 것이 되었구나.
내 동생은 나에게 먹는 것에 비해 살이 찌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했더랬다. 그때의 나는 60킬로가 넘었는데도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정말 내가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이었던가. 김장철 즈음에 부모님 집에 갔었는데, 김장을 앞둔 엄마는 내가 오는 날, 냉장고 청소를 했고 그날 우리 집 냉장고에 반찬이라고는 이웃집에서 얻어온 김장김치 두 포기가 전부였다. 엄마는 내게 미안하다며 갓 지은 밥에 김장김치를 꺼내 주었는데, 나는 김치 하나에도 밥 두 공기를 해치웠다. 매일 떡볶이와 라면 등 밀가루 음식을 먹어도 속이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던 나는 요즘 점심에 국수를 먹으면 다음날 아침까지 속이 부대끼는 경험을 하고 있다. 항상 라면이 구비되어있던 우리 집 찬장에 라면은 사라진 지 오래이고, 내가 좋아하던 떡볶이도 주말 낮에 한 번씩 시켜먹을 뿐이다.
나의 체력은 1년이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조금만 운동을 게을리하면 몸 이곳저곳이 붓기 시작하고, 불면의 밤은 자꾸 늘어간다. 이유 없는 두통이 시작되었고, 아무리 운동을 해도 뱃살은 계속해서 차오른다. 게 중에 가장 슬픈 것이 내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먹고 난 후 시작되는 소화불량이다.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의 대다수가 밀가루 음식이거나 고기 종류인데 가장 좋아하는 것은 튀김류이다. 그러다 보니 배달 어플을 켰다가도 소화불량을 생각하면 슬그머니 배달 어플을 끄고, 잡곡밥에 국을 끓여 간단히 한 끼를 해결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때의 슬픔은, 무엇보다 먹는 것을 좋아했던 내가 느끼는 슬픔은 그야말로 깊어지는 것이다. ‘죽기 전에 먹고 싶은 단 하나의 음식은?’이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아주 맛있는 커피 한 잔’이다. 죽는 것도 슬픈데, 소화가 안되어 소화제를 챙겨 먹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더욱 슬프니까.
우리 회사에는 90년대 생이 몇 명이 있다. 80년대 생인 나는 어쩐지, 90년대 생인 직원들보다 70년대 생인 직원들과의 대화가 더욱 편하게 느껴진다. 원치 않게 꼰대의 나이가 되어서인지 진짜 ‘꼰대’로 평가되는 것이 항상 두려운 편인데 90년대 생인 직원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겉돌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나는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길을 선택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들의 행동에 놀라 입을 벌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나를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두 가지의 소화불량을 겪는 어른이 되었다.
이를테면 회의 중, 내가 다른 팀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를 몰라 그 용어의 의미를 묻자, 바로 내 옆에 앉은 90년대 생 직원이 “풉”하고 웃었다. 내가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는데! 원활한 회의를 위해 정확한 의미를 물어본 것이었는데!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이 비난을 받을 일이 아님에도 내 질문에 그렇게 “풉”하고 웃다니! 나는 무척 화가 났지만 못 들은 척을 했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그 팀의 팀장님이 서둘러 그 용어의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그날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그 무례한 웃음을 모른척했더랬다. 실은 그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90년대 생 직원에게 업무 지시를 하던 팀장님이 ‘힘들겠지만 규정상 앞으론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고 하자 그 직원은 팀장님의 바로 옆자리에 서서 “아씨~”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조금 떨어져 있던 나는 놀란 눈으로 그 둘을 쳐다봤는데, 그 팀장님은 못 들은 척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이지 나는 이런 것들이 소화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맞추어야 하는 것인 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직장이란 다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모인 곳이지만 하루에 8시간 이상을 함께하는 곳이니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게 내 생각인데,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꼰대’가 되지 않는 것인 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상무님이 자리에 계시냐”라고 물어보면 “계신다” 혹은 “지금은 안 계신다”로 답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나에게 “지금 없다.” 혹은 “있다”라고 대답하는 그들을 보면 내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출근해서 사무실에 들어오면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바로 코 앞에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해도 대꾸를 하지 않는 직원들을 보면 기분이 상하는 것이다.
물론 몇몇의 사례를 가지고 ‘90년대 생은 이렇더라’ 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임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태도를 장착한 90년대 생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내가 나의 소화불량 때문에 그 좋아하던 음식들을 조심하고, 건강식을 챙겨 먹는 것처럼 요즘 사람들의 행동이 소화가 되지 않을 때면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하여 그들을 피해야 하는 것인가. 그저 못 본 척, 듣지 못한 척하며 나의 일신이 평안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인가. 이도 아니면 나도 그들처럼 행동하며 억지로라도 소화를 시켜보려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
오늘 나는, 아주 오랜만에 제육볶음을 시켜먹었고, 오랫동안 동네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