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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Jun 06. 2021

아빠가 사다리에서 떨어지다니!

아빠, 이제 청춘이 아니잖아요.




‘아빠가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다쳤대.’

‘피도 나고 머리부터 떨어져서 바닥에 부딪혔대’


그날 아침엔 5월 결산이 끝난 후, 아시아 재무팀과의 회의가 있었다. 회의 중 아시아 재무담당자가 요청한 숫자를 확인하느라 엄마의 전화를 받지 못했고, 회의가 끝난 후 대표님, 팀장님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왔더랬다. 언제나처럼 왕갈비탕을 주문해놓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동생에게 온 카카오톡 메시지를 확인했더니 아빠가 사다리에서 떨어졌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놀란 나는 밖으로 나가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이게 무슨 일이야?”

“응. 이제 괜찮아. 아빠랑 병원 가고 있어.”

“119를 부르지 그랬어.”

“아니야 지금 병원 가는 중이니까 가서 연락할게.”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셋째에게 전화를 거니 셋째는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우선 병원에 가신다고 하니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다시 식당으로 돌아와 대표님과 팀장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두 분은 급한 건 다 끝났으니 집에 내려가 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사무실에 돌아와 급한 일을 마무리해놓고 나는 시골로 향했다. 


아빠는 이제 예순여섯이다. 내가 곧 마흔을 앞두고 있으니 아빠는 영락없는 ‘어르신’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낙상사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몇 년 전에도 잔디 깎는 기계를 운전하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던 찰나에 3미터 아래로 기계와 함께 추락한 적이 있었다. 갈비뼈 몇 개가 부러지고, 몇 개는 금이가고, 날개뼈에도 금이 가는 큰 사고가 있었다. 아빠는 일을 하는 중에는 핸드폰을 잃어버릴까 봐 잘 들고 다니지 않았는데, 기계에 깔린 채로 몇십 분을 혼자 있던 아빠는 이제는 항상 핸드폰을 휴대하고 다닌다. 어쨌든, 그때 그 사고로 인해 우리는 주말마다 아빠 병문안을 다녔고, 아빠의 몸이 다 낫기를 기다리며 옆에서 지켜보는 엄마가 무척 고생을 했었다. 물론 환자 본인이 제일 고생을 했었지만 말이다. 


우리 부모님이 건강하신 것이 나와 동생들에게는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또 한 번의 낙상사고는 내 회로를 정지시켰다. 다행히 뇌진탕이나, 뼈가 부러지진 않았다는 검사 결과를 받아 들었다. 과수원에서 사과 적과 작업 도중 사다리에서 떨어졌던 터라 바닥엔 푹신하게 거름과 풀이 깔려있었다. 대신에 떨어지면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위에 팔을 찔린 것이었다. 따라서 찢어진 부위를 꿰맨 정도에 그치게 된 것이었다. 


봉화로 급히 내려가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나 조금 전에 출발했는데, 아빠는 뭐해? 주무셔?”

“니 아빠는 지금 왼손으로 풀 뽑아.”

피식 웃음이 났다. 예순여섯을 먹은, 나이 든 내 아빠가 오른쪽 팔에 붕대를 감고 쪼그리고 앉아서 풀을 뽑는 모습을 상상하니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만하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나는 집에 도착했다. 아빠를 만나자마자 나는 랩을 하듯이 잔소리를 했다.

“아빠! 아빠는 이제 청춘이 아니잖아요.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사다리에서 떨어지냐고요!”

아빠는 민망한지 웃었다.

“괜찮다니까, 뭐하러 니한테까지 전화를 했냐. 너그 엄마는.”

“아빠가 병원에 안 간다고 고집 피우니까 나한테 전화를 하지! 꼭 이렇게 일하다가 뛰어오게 해야 해! 이제 제발 조심 좀 하세요! 진짜!” 


아빠에게는 잔인한 말이지만, 아빠는 더 이상 날렵하던 옛날, 그 청춘의 모습이 아니다. 내가 그의 젊음을 고스란히 가져온 것 마냥 아빠는 늙어버렸다. 내 어린 시절의 아빠는 오토바이에 우리 세 자매를 태우고 아침이면 학교까지 데려다주었고, 보일러나 수도가 고장 나면 뚝딱 고쳐내고, 겨울이면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을 하고도 봄이 오면 씨를 뿌리고 새벽부터 농사를 짓던, 강한 체력을 지닌 아빠였는데. 젊은 시절에 했던 고생은 하필이면 늙은 몸에 찾아들어 아빠의 다리를 아프게 했고, 허리에 머물며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얼마 전 내 오랜 동네 친구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내 기억에 정정하셨던 그 할머니의 죽음에 놀라서 다른 친구의 할머니는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이미 작년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에 놀랐더랬다. 

“별 수 있나. 한 세대가 가는 거지 뭐. 그다음 차례는 우리지.”

담담한 그들의 이야기에, 아빠와 친했던 아저씨들 몇몇은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에,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그들의 무미건조한 이야기에 나는 왈칵 무서워졌다. 살면서 죽음을 생각한 적이 거의 없지만, 죽음은, 특히 아빠에게 죽음은 너무 가까운 곳에 와있었다. 아빠는 몇 년 동안 절친한 친구들 중 몇을 잃었다. 예순여섯이 되어버린 아빠를 보며 마흔을 앞에 둔 나는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몇 번이나 일하는 도중에 집에 달려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화내지 말아야지, 너무 놀라지 말아야지. 내 부모는 늙었고, 그들의 젊음을 대신 살고 있는 내가 부모님을 걱정하고 살피는 일은 당연한 일일 테니. 


“엄마, 나 열심히 돈 벌어서 20년 뒤쯤 은퇴하면 집에 내려와서 엄마 아빠랑 재미나게 살 거니까, 그때까지는 제발! 건강해야 해!”

“야! 난 싫어! 내가 왜 니랑 같이 사노? 나는 니 아빠랑 살 건데!”

쳇, 뭐야. 딸내미가 늙은 부모 모시고 살겠다는데 단박에 거절하다니. 아, 남자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것보다 조금 더 아팠다. 


아빠의 낙상사고로 많이 놀랐던 엄마는 여전히 웃기고, 아빠는 지난번보다 조금 더 늙었지만 여전히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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