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가르치는 것은 없었고 아이들에게 원기둥을 4B 연필로 그리기를 시키고 있었다. 그 활동이 끝나면 무슨 수업을 하냐고 물으니 정육면체 그리기를 시키면 된다고 했다. 그다음 수업은 수행평가로 우유갑 정밀묘사를 시키면 된다고 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거의 20년 만에 학교라는 곳을 오게 됐지만 학교는 달라지지않은 것 같았다. 교사를 해본 경험은 전무했지만 다른 수업을 하고 싶었다. 다음 해가 되었고 나는 1학년을 통째로 맡아 드디어 내가 기획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어떤 수업을 하면 좋을지 책도 많이 찾아 보고 교재 연구도 많이 했다. 교과모임을 찾아다니고 교과 인터넷 모임의 자료들을 거의 다 보았다.
선배 교사들은 대개 이런 수업들을 하고 있었다.
종이공예, 학교 환경 꾸미기, 초코파이 위에 공판화로 파우더를 뿌린 그림 그리기, 자화상 그리기, 친구 얼굴 팝아트로 그리기, 판화, 서예, 캘리그래피, 클레이로 소조 작품 만들기, 사진과 그림 합성하기, 낙엽으로 색 단계 그러데이션 하기, 그림자 사진 찍기, 실을 이어 그림 그리기, 전각(도장), 정크아트(재활용품으로 작품 만들기), 과자 봉지를 뚫어 그 부분만 그려서 붙이기, 전지에 펜으로 자유 선 그어보기, 추상작품 그리기, 모빌 만들기, 어둠 속에서 빛으로 그림 그리기, 학교 곳곳에 숨은 그림 그리기, 작품 감상하기 등다양하고 재미있는 활동들이 많았다.
그런데 대부분이 표현 수업이었다.
선배 교사들은 대부분 서양화 전공자였다.
내가 고등학교 때를 떠올려 봤다.
나는 미술시간이 제일 싫었다. 일단 모든 게 다 귀찮았다. 미리 재료를 여러 가지 챙겨 와야 했고, 그 재료들도 자잘하게 많아서 꼭 빠지는 게 하나씩 생겼다. 또 미술실까지 가는 것도 너무 추웠고 미술 선생님의 촌스러운 옷과 화장도 마음에 안 들었다. 2시간이 너무 지루했고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에게 필요한 활동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귀찮고 번잡스럽지 않으면서 아이들 전체가 함께 할 수 있는유용하면서도 감동적인 수업 콘텐츠를 고민했다. 대학 때 갔었던 배낭여행이 떠올랐다.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 웨스트민스터 사원,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셰 미술관, 피카소 미술관, 베르사유 궁전,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성당,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갤러리 등등 유럽 유수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갔었지만 조금의 감동도 얻지 못하고 돌아온 기억이 났다.
거기에 핀을 꽂았다. 요즘은 해외로 나가는 게 어려운 시대가 아니다. 학생들은 언젠가는 해외여행을 갈 것이고 그 안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한 번쯤은 방문할 것이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몰랐던 20살의 나처럼 소중한 기회를 바보같이 지나쳐 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여행가이드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의 도슨트였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TV프로그램으로 현장 분위기를 봤고, 항공권 티켓팅부터 호텔 예약, 미술관 입장권 예매, 거기까지 가는 길까지 구글맵을 이용해 가상 여행을 떠났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다.
미술교과는 교과서를 토대로 수업할 수가 없다.
교과서 내용은 단편적, 파편적이고 방대하다. 맛보기로 얕게 나열된 것이기 때문에 교사가 직접 교육과정을 재구성 해야 한다.하나라도 의미 있게 경험하고 느껴보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거의 매일을 야근했다. 야근이라고 해봐야 회사 다닐 때의 칼퇴근 시간이었다. 행복했다.
강의식 수업이 될까 봐 걱정도 되었지만 아이들은 다양한 감상평을 이야기하며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있어했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동선을 따라 소장되어 있는 작품들을 작가의 삶과 역사적 시대 배경,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스토리텔링 수업을 진행했다.
[인문예술] 나의 첫 수업 컨텐츠였다.
<선생님과 유럽 배낭여행 가자! (선생님은 여행 가이드 & 미술관 도슨트)> 수업 자료 일부
[선생님과 유럽 배낭여행 가자! (선생님은 여행 가이드 & 미술관 도슨트)] 수업의 부분 / 작가들의 삶, 작품의 숨은 감동 이야기
교사 3년 차에 학생들이 방과후교실에서 미술수업을 개설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동료 교사들은 무척 신기해했다.
"교직 20년 동안 미술 방과후수업 해달라는 건 처음 봐요. 미대 입시하는 아이들인가 봐요?"
아니었다. 그냥 수업의 연장으로 방과후수업을 열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내 수업을 재미있어하고 수업 시간에 특히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집중했던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원하는 건 실기 수업이 아니었다. 미술 수업시간에 들었던 수업의 연장을 바랐다. 수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업시간보다 더 수준 높고 이슈가 담긴 주제로 무엇이 좋을까.
크게 인문예술에 방점을 찍었다. 학교에서는 들을 수 없는 수업을 기획했다. 대학교 교양강좌보다 더 재미있고 유익하고 현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수업 컨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누구도 다루지 않고 시도하지 않았던 나만의 수업은 여기서 출발했다. 임용 공부를 했던 때처럼 수업자료를 만들었고 총 10차시 수업으로 구성했다.
1. 동양과 서양의 세계를 보는 서로 다른 인식의 차이
(서양에서는 "More tea?"명사로 말하고(개체성 중시),
동양에서는 "더 마실래?" 동사로 말한다(관계성 중시),
'INDIVIDUAL(in+divide: 더 이상 나눌 수 없다)' 단어에서 엿볼 수 있는 서양의 철학과 'I see.' = 'I understand.'로 알 수 있는 서양 철학의 특징들과 미술과의 상관관계)
2. 이미지 소비 사회
(인스타그램의 이유 있는 항변, 현대는 상품이 아닌 이미지를 소비한다. 기호학자 소쉬르의 시니피앙-시니피에 이론으로 바라본 현대의 패션 산업 이야기)
3. 스타벅스는 광고를 하지 않는다
(스타벅스의 마케팅 전략: 우리는 스타벅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4.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 이론으로 바라본 현대의 전쟁과 브랜드의 상관관계. 물/ 다이아몬드/ 커피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당연히 물인데 학생들은 다이아몬드라고 대답한다.))
5. 루소의 달과 김홍도의 달
(서양은 직접적으로 달을 그리고, 동양은 주변을 그려 달이 스스로 드러나게 한다(홍운탁월). 서양은 사람이 주인공이고 동양은 배경이 주인공이다.)
6. 이미지의 배반이 꾸민 이상한 광기
(걸프전과 911 테러가 마치 컴퓨터 게임 같았던 이유/홍콩사태와 전쟁, 이미지가 갖는 그 폭력성에 대하여/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림이 말하는 것)
7. 이미지 홍수 사회
(미디어가 주는 이미지는 어떤 의미로 변용되어 우리 삶에 침투하는가?)
8. 샤넬에서 로고를 뗀다면 그래도 살래?
(롤랑 바르트의 철학과 세계의 모든 기업이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데 혈안이 된 이유의 상관관계)
9. 마네의 <올랭피아>와 신윤복의 <주유청강>
(상류층의 흐트러지고 흥건한 시정, 경제가 부흥함에 따라 예술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과 조선시대 신분사회의 동요의 닮은 점)
10. 쓸모없는 걸 사게 만드는 것이 디자인이다
(기업의 마케팅 전략: 넛지 마케팅, 바이럴 마케팅, 공격적 마케팅, 우리는 만년 2등입니다 마케팅, 디스 마케팅 등 마케팅 전쟁)
동양과 서양의 세계를 보는 서로 다른 인식의 차이
스타벅스는 광고를 하지 않는다
이미지 소비 사회 (기호학자 소쉬르의 시니피앙, 시니피에 이론 접목)
이미지의 배반이 꾸민 이상한 광기 (현대 전쟁은 왜 게임 같을까? -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 이론 접목)
왜 인문학인가? (샤넬에서 로고를 뗀다면? 브랜드는 지금 인문학 전쟁 - 롤랑바르트의 이론 접목)
학교 일과가 끝나고 듣는 방과후수업은 지루하고 힘들다. 교사들도 부담스러워하고 학생들은 자주 도망간다. 학생들 요청으로 방과후교실 수업을 개설하긴 했지만 미술 방과후수업을 과연 몇 명이나 신청할지가 염려됐다. 내 수업을 들은 적 없던 2학년 학생들도 수강신청을 했고 예상했던 인원이 넘는 학생들이 신청했다.
방과후교실의 미술 수업명은
‘예술과 디자인 속 인문학 코드’였다.
국어 선생님이 내 수업을 청강해도 되냐고 물어왔다.
그냥 하시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내 수업을 들어보고 싶다고 꼭 받아달라고 하셨다. 학생들은 방과후교실 신청을 QR코드로 한다. 학번과 이름을 입력하면 신청이 된다. 그런데 국어 선생님은 학번이 없으셔서 방과후교실 신청을 못했다고 하셨다.
이런 영광이 다 있을까.이건 동료장학으로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국어 선생님에게 흔쾌히 오시라고 했고 꼭 수업 피드백을 신랄하게 해 달라는 부탁도 드렸다. 국어 선생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 수업을 들으러 오셨다.잊지 못할 영광이었다.
학교에서 미술교과의 입지를 절감한 나는 결심했다.
대체 불가능하나 미술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수행평가에서 그리기를 없앴다.
그림등 표현활동은 수업 곳곳에 Spot으로 넣었다.
학생 주도 수업형 프로젝트 수업은 현실적으로 시간이 부족하고 교사의 수업 준비와 피드백에 대한 부담이 큰 형식이었다. 그래도 해보고 싶었다. 우리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며 공감하는 활동이 매우 부족해서였다.
나중에 회사를 다니거나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내 의견을 정리해서 논리적이고 깔끔하게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발표와 토론 수업을 수 차례 했고 그때마다, 또 각 반마다 수업 컨텐츠와 의미들은 다르게 생성됐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많은 이야깃거리와 시너지가 생산됐다.
교사가 지식을 전달해 주는 강의식 수업과 학생들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내는 프로젝트 수업은 모두 중요해서 병행하기로 결정했다. 올해 수업의 컨셉은 1학기는 모더니즘 수업, 2학기는 포스트 모더니즘 수업이다.
'모더니즘'은 철학 용어로 답이 정해져 있고 지식의 권위가중요하다. 사회 현상과 지식에는 우열이 있다. 전문가가 중시되고 권위를 가진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컨셉에서는 [미술사, 미술비평]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스토리텔링 수업이 어울린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말 그대로 모더니즘 이후의 변화를 말하며 모더니즘과는 반대로 지식은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하며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지식의 권위와 전문가를 부정하고 너와 나의 관계성, 지식의 탐구, 학습의 주도성이 중시된다.
이 컨셉에서는 [디자인, 시각문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만나게 되는 모든 이미지와 문화를 읽어내는 시각적 문해력과 비판적 사고능력을 키우는 수업이 어울린다.
구체적 수업 컨텐츠로는 Media Art, Interactive Art, Universal Design, 공공미술, 광고디자인, Technology와 예술 수업을 기획했다.
활동으로는 우리도 현대미술 작가가 되어 퍼포먼스 미술을 체험해 보기로 했다. 현대미술 작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작품처럼 두 명이 마주 보고 앉아 서로의 눈동자를 1분 동안 바라보는 것이다. 타인의 인생의 우주 속으로 여행을 해 보는 체험을 계획했고 다음 주에 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이 활동을 무척 기대하고 있다.
또 다른 수업으로는 한국사와 융합한 수업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지나 일제강점기까지 역사 이야기 속에서우리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방법과 가치, 감동을 설명해주는 수업도 했다. 한국사 시간에는 진도 나가느라 딱딱할 수 있는 내용을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하듯이 스토리텔링 역사 수업도 병행했다. 아이들은 덕분에 한국사 수업에서 이해가 잘 됐다며 좋아했다.
팔만대장경과 고려청자, 몽유도원도와 간송 전형필 선생의 문화재 수집 내용, 특히 이정재 주연의 영화 <관상>과 몽유도원도를 융합한 수업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로워 했다.
서양미술사를 세계사적 맥락에서 소개했고 영화, 광고, 도서 등을 엮어서 단편적으로 보는 서양미술사가 아닌 사회적 이슈와 연관 지어 읽고 해석하며 느끼는 감상법을 수업했다.
디자이너로 근무했을 당시에 실제로 내가 썼던 브랜드 사업계획서와 상품기획서, 트렌드 분석과 디자인 동향 보고서, 머천다이징 결과 보고서를 수업 시간에 보여줬다. 구두 디자인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디자인되어 어떻게 생산되는지 전 과정을 실제 자료들을 통해 소개했다. 마지막 시간에는 내가 디자인한 구두들(내 돈 주고 사야 하므로 10켤레 남짓밖에 없다.)을 가지고 와서 신어 보였다. 아이들은 이 수업을 굉장히 흥미있어 했다.
디자인 수업에서 구두 디자이너였을 때 내 작업을 정리한 포트폴리오와 함께
미국 슈즈브랜드 런칭 준비를 위해 분석, 작성했었던 상품기획서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디자인 수업을 했다. 내가 디자인한 구두를 신고.
현대는 '1인 미디어 시대'이다.
이제는 교사도 '컨텐츠 기획력'으로 유의미한 가치를 생산해 내는 '1인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하지 못하는 수업.
나만이 할 수 있는 미술 수업,
그래서대체 불가능한 교사.
'미술'이라는 교과명은 시대착오적 발상을 담고 있다. 아름다움과 표현에 갇힌 기술에서 현대의 이슈와 연관된 비평과 감상, 시각적 문해력이 담긴 미술로. 아름다움만을 강조하는 미술이 아닌 미와 추의 세계관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문예술'이 되어야 한다.
미술 작품이 작품으로서의 생명력을 가지려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관객과의 소통이듯 수업도 학생과의 교감이 이루어졌을 때 그 수업은 수업으로써의 정당성과 생명력을 가진다.
나는 예술을 접하게 하고 소개하는 인문예술 메신저다.
1년 간의 미술 수업이 끝나던 날, 아이들이 써주었던 미술수업에 대한 선물 같은 롤링페이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