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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Kim Oct 24. 2021

저는 미술교사입니다.

남은 이야기들

수험시절을 함께 보냈고 함께 합격했던 풋풋했던 나의 어린 친구들은 하나둘씩 내 나이가 되었다. 차례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둘째를 낳고, 임신을 했다. 내 조언에 고마워 한 띠동갑 친구는 오늘 결혼을 했다.



힘들고 초라한 시절을 함께 겪었고, 함께 목표를 이룬 만큼 평생 함께 하고픈 나의 미술 교사 친구들.

유능하고 마음 선한 미술 교사 친구들이 세 명이나 있다.



신규교사일 때, 그리고 조금 익숙해졌다고 자신 있게 나섰던 3년 차 수업비평 발표 때 선배교사들로부터 애정의 쓴소리를 듣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쩌면 지금보다 느린 속도로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타인의 시간이 되어 간다.

타인이 지나온 시간이 되어 나의 시간을 살아간다.





교육학 관련 한 교수님을 만났다.

대학입시전형과 고등학교 학교생활기록부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선생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생기부는 80%가 부풀려진 것 아니겠습니까? 신뢰할 수 있는 자료가 못 되죠. 게다가 생기부에 기록된 걸 보면 말이 안 되는 내용이 너무 많아요. 교사들이 글을 그렇게 못 써놨는데 어떻게 학생을 파악할 수 있겠어요? 가만히 보면 교사들이 글을 제일 못 써."



묘하불편했다.

나는 아직도 저경력의 꿈과 희망이 많은 초보 교사이고 아직도 구두 디자이너가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도 '교사'라는 옷이 몸에 맞춰져 있었나 보다. 일반화의 오류, 특정 집단에 대한 평가는 역시나 위험하고 불편하다.




해마다 오히려 교사에게 힘을 주는 보석 같은 아이들이 있다. 나는 작은 씨앗 하나를 준 것 같은데 커다란 그릇에 담긴 한 그릇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있다. 내가 준 애정의 관심으로 알알이 열매를 맺어오는 아이들이 매년 등장한다. 선하고 이로운 성정을 타고난 아이들을 보며 내가 더 진하게 배운다.



무한 신뢰가 가는 예쁜 아이들은 대학에 가서도 자신의 역량을 잘 가꿔나간다. 대학생이 된 소녀들, 군대를 제대하고 진짜 성인이 된 소년들. 이 아이들이 사회로 나갔다는 게 같은 사회인으로서도 안심이 되고 든든하다. 어디서나 역량을 펼쳐 선한 영향력으로 물들이며 사회의 고운 향기가 되기를 기도한다.



몇 년 전 군대를 제대한 졸업생이 나를 찾아왔다. 특별히 잘 해준 것도 없던 아이라 의외였다. 그런데 그 아이의 편지를 뭉크했던 기억이 난다.



"고3 때 저는 저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괴로웠습니다. 선생님은 기억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때 작정하놀렸던 친구들 선생님이 수업 때 해주신 말씀을 듣고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저도 커밍아웃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말씀 덕분에 저는 지 않았습니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기억이 떠올랐다. 가장 정글 같았던 고3 남학생 반. 운동하는 190cm가 넘는 아이들이 몰려있던 반에서는 약한 남학생들에게 자주 성적 발언과 조롱을 일삼았다. 폭력사건도 자주 벌어졌다. 하루는 내가 너무 화가 나고 실망스러워서 수업을 접고 내가 만났던 경험들을 이야기 해줬었다.

밀라노에서 만난 수석디자이너 동성애 커플, 대학 때 커밍아웃을 했던 친구, 페미니즘을 향한 혐오,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과 증오.



청소년들은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아직 사회적 역할과 관계에 대한 태도가 미성숙한 청소년들이기 때문에 동물적 본능으로 사람을 변별한다.



밝고 멋진 에너지로 세상을 가득 채울 아이들.

그 아이들이 물들이는 세계가 궁금하다. 

나도 학교 안에서 물들이고 싶다.

세상을 물들일 많은 아이들의 마음 속에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싶다.


몇 년 전 나의 반 아이들. 학교 다닐 때 너무 웃겨서 매일 내 배꼽이 빠지게 만들었던 귀염이들이 어여쁜 숙녀가 되었다.
자기들이 결혼할 때 꼭 주례를 서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며 약속을 받아갔다. 나의 힐링들이다.


광고디자인 비평 수업 중 스토리텔링 광고의 예시로 '힘내라 대한민국 고3'이라는 EBS의 수능 응원 광고를 선택했다. '고3들의 마지막 수능 모의고사'라는 주제로 한 몰래카메라 영상이었다. 국어 지문 중간에 엄마, 아빠의 편지가 숨겨져 있었고 문제 풀이에 집중했던 학생들은 고개를 숙이며 소리 없이 우는 감동적인 광고였다.



나는 그때 내 수업에서, 처음으로 고3 때의 나와 만났다.

두 가지 생각이 스쳤다.

1. 고마워.   2. 미안해.



1. 수고 많았어. 돌아보니 조금의 후회도 없어. 열심히 해줘서 고마워.

2. 미안해. 40대의 나는 고작 이것 밖에 못 됐어.



누군가가 그랬다. 나는 대기만성형이라고.

그래서일까. 나는 숫자 중에 9를 가장 좋아한다. 

미완결의 숫자.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지는 불완전한 9.

나는 숫자 9다. 나는 불완전한 교사다.



12월 말에 태어난 내 생일과 어울리는 숫자.

종국에는 나만의 열매가 열릴 것이라 믿는다.

10으로 완결되기 직전의 마지막 1의 걸음 속에

교사로서의 나의 가치와 역할이 있을 거라 믿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친구이자 스승은 미술과 음악, 문학이다. 인문학과 예술이다. 일개 교사인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1만큼의 작은 한 걸음일 것이다.



나는 삶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이고,

수업을 디자인하는 예술교사다. 그리고

동기부여와 학습코칭을 디자인하는 학습 멘토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 한 그 꽃"



임용시험 초시 때 낙방하고 우연히 보았던 그 시처럼

이제는 놓쳐서 보지 못 하는 꽃이 없도록

남들보다 12년쯤 지각 인생을 살고 있는 내 인생이

결국은 가치 있는 10의 차고지에 가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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