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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Kim Oct 24. 2021

내 아이들과 함께 한 수험 생활

엄마 같이 자요! 네? 엄마랑 같이 자고 싶어요!


실전 1차 논술 필기시험이 끝난 날, 느낌이 왔다.

굉장히 억울한 점수를 받았겠구나.

그런데도 함께 드는 생각은 우습게도

"아! 이제 실기하러 미술학원 안가도 된다!"


임용실기 2  [발상과 표현]  마지막 모의실기시험 (4절, 포스터컬러/  2시간 반 과정)



1차 시험 후 맹훈련하는 2차 실기(2과목)와 수업지도안, 수업실연, 교육학 구술 준비는 고통이었다. 지금껏 노력한 게 허사로 돌아가도 좋으니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매시간 들었다. 불합격 소식을 듣고 미술학원에 가서 짐을 다 챙겨 나왔다. 습관처럼 내 발은 노량진 육교를 지나 지하철 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매일 오갔던 승강장에 늘 있었던, 그동안 잰걸음으로 암기 노트를 보고 다니느라 보지 못했던 글귀를 그제서야 봤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눈물이 핑 돌았다. 대체 난 지금껏 뭘 한 거지?

담담했던 마음은 그때 무너졌다.



언니와 통화를 하며 처음으로 교사의 꿈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던 날의 흥분이 떠올랐다. 아기를 안고 교육대학원 입학을 알아보던 때도 떠올랐다. 그럼 그렇지. 애 엄마가 애들 키우는 것 하나도 버거워서 헤매는데 이 지경에서 고시 같은 임용시험이라니 내가 미쳤지. 전공 학원비, 교육한 인터넷 강의비, 교재비, 미술학원비, 몇 달 하숙비, 생활비 등 500만 원 정도. 그래. 5천만 원도 아니고 경험 값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돈이야. 그만하면 됐다. 그래도 미술교육석사가 됐잖아. 잘 했어. 여기까지도 잘 한 거야.




두꺼운 책들과 물감, 화구 등 무거운 짐을 양손 가득 들고 지하철을 내려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잘 있어라 노량진아. 우리 이제 진짜로! 다시는 만나지 말자.

이 결심은 고 3 때도 했던 결심이었다.

그러다 재수 때 노량진을 또 갔고, 그 때도 또 했던 결심이었다.



집으로 가는 마을 버스가 도착했다.

뛰어가서 탈까? 짐도 무거운데 그냥 다음 버스 탈까?

뭐하러. 힘들게 뛰어가서 탄들 만원 버스 속에서 콩나물 시루처럼 무거운 짐들고, 서서 집까지 갈 텐데. 다음 빈 버스 오면 1등으로 타서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가자.



그 순간 지혜의 빛인지 악마의 유혹인지 이런 생각이 번뜩 스쳤다.



사람 많은 버스에 꼴지로 타서 힘들게 가지 말라고.

(꼴지로 합격해서 힘든 학교 가지 말라고.)


다음 새 버스에 1등으로 타서 편히 앉아 가자.

(다음 시험에서 합격해 좋은 학교로 배정 받으려고.)


그럼 이게 혹시......

내가 다음 시험에서 1등 합격한다는 복선인가?



불합격하더니 정신이 나갔는지 말도 안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다음 시험에서 내가 1등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더 정신 나간 상상이 들었다.





대학원 졸업식이 끝났다. 왁자지껄 대잔치가 파한 후처럼 공허했다. 노량진 학원도 끝났고, 숙대 앞 하숙집 생활도 끝이 났다. 다시 집이다. 다시 일상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왔다. 비록 임용시험에서는 낙방했지만 3년 간 미술교육 석사학위 취득도 성취라면 큰 성취였다. 이 학위로 다른 일을 시작할 수도 있을 일이었다. 나는 이제 정말로 당당히 포기할 수 있었다.



그 악마 같은 점수만 아니었다면......



차라리 시원한 점수로 팍 떨어졌다면 도전에 의의를 두고 행복하게 접을 수 있었을 텐데, 악마의 숫자는 등 뒤에 붙은 벌레처럼 자꾸 찜찜하게 돌아보게 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두 달 간 아이들만 키웠다. 집안일만 해도 쉴 틈이 없었다. 4월이 되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벚꽃이 흐드러질 무렵, 빨래를 개키며 문득 결심이 섰다.

1차 논술시험까지 8개월. 무려 8개월이나 남아 있다.



교육학은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혼자 공부했고, 전공은 논술시험 실전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수요일만 노량진 학원에 갔다. 또 다시 잿빛 노량진이다. 



일상에서의 공부시간을 최대한 확보해야만 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있는 5시간이 전부였다.

혼자 살림과 두 아이의 육아를 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은 피로와 불안을 가중시켰다. 기립성 저혈압, 빈혈, 간기능장애로 항상 무기력한 상태였고 아침에는 기운을 차리기가 더욱 힘들었다.


형광펜 부분은 실전 논술시험 D-1일 밤, 마지막으로 점검하며 그은 것. 다시는 보지 않을 작정으로 형광펜으로 그어가며 암기를 확인했다. 지금도 내 비법노트는 보물 1순위이다.
구조적 암기를 위한 정리 노트. 임용시험의 모든 범위를 모조리 넣었다. 두꺼운 전공서 60여 권을 모두 읽고 외워 정리했다. 이것만 보면 될 정도로 농사 짓듯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대학 때 진로를 고민하다 쇼호스트에 관심이 생겨 백화점 명품관 아르바이트를 석 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느꼈던 생각은 매장 안과 매장 밖은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이었다. 매장 안에서 매장 밖 통로를 바라보고 있자면 친구, 가족들과 함께 유유히 지나가는 사람들이 마치 영화 속 사람들 같았다. 내가 수감생활 중인 것 같았다. 자유가 결박된 상태의 의무적 신분만 있던 나, 그리고 자유의지에 의해 여유를 누리고 있던 사람들.



고3, 재수 때처럼 지금의 임용시험 수험 시절도 딱 그랬다. 큰 아이의 손을 잡고 둘째 아기는 아기띠로 안고 마트를 갈 때도 손에는 책을 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큰 아이가 종알종알 새로운 단어를 자신있게 엄마에게 말해도, 내 품에 안긴 아기가 갑갑함에 몸을 뻗쳐도 내 머리는 논술을 줄줄 쓰고 있었다. 입은 미친 여자처럼 늘 중얼중얼댔고 눈 앞에 사람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부딪힐 때가 많았다. 짐 캐리의 영화 '트루먼 쇼' 같았다. 지난 3년처럼 또 다시 매일이 투쟁이고 감옥 같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어린이집을 오갈 때, 마트 갈 때 등 이동시간에 외우려고 따로 만든 메모장



1분이라도 빨리 재워야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윽박지르기도 하고 달래고 야단치기도 하면서 꾸역꾸역 하루씩 지워나갔다. 엄마와 놀고 싶은 아이들은 잠들지 않으려고 발악을 했고 자면서도 "엄마, 어디 가지 마요! 우리 꼭 같이 자요."라는 말을 했다. 잠만 들면 공부방으로 도망가는 엄마여서 아이들은 내 작은 움직임에도 내 옷을 붙잡았다.



어떤 날은 아이들을 겨우 재우고 빠져나와 책상에 앉았는데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무섭고 쎄한 느낌이 들었다. 무서움을 떨치려고 중얼거리며 공부하는데 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환청이 들리나.



무서워서 커피라도 마시려고 책을 덮는 순간 기절할 뻔 했다.

언제 빠져 나왔는지 두 놈이 떨어질새라 서로 껴안고, 내 책상 밑의 발판 벤치에 누워있었다. 엄마와 놀고 싶었던 아이들은 엄마가 화장실에 간 틈에, 재빨리 엄마 책상 아래로 숨어 들었던 것이다. 엄마 다리 코 앞에서 엄마를 만질락 말락 하며 내 중얼거림을 메아리처럼 따라 말하고 있었다.



내 책상 상판은 어두운 색 강화 유리라 책을 덮은 나는 책상 아래 네 개의 눈동자와 마주쳤고,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 주저 앉아 버렸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죄를 지은 것 마냥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잘못한 것도 없이 우는 아이들을 안고 달랬다. 나도 눈물이 나왔다. 공부를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목구멍 끝을 타고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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