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병석에 누워계신 엄마를 매일 간호하며 녹초가 된 상태로 졸음을 겨우 이기며 공부했다는 글이었다. 그때 든 생각은 '이렇게 몇 시간 공부하지 않아도 합격할 수가 있구나! 나 같은 사람도 합격할 수 있겠다!'였다.
육아와 살림만으로도 벅찬 일상에서 순수 공부 시간도, 체력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합격자들은 하루에 몇 시간을 공부했을까. 문제는 '얼마나' 양이 아닌, '어떻게'라는 질의 문제였는데 어리석게도 부족한 시간을 탓했다. 매 순간이 불안했다. 결의를 다져도 불안은 틈만 나면 불쑥 올라왔다. 불안에 잠식되어 가는 날이 다반사였다.
'내가 될까? 이래서 되긴 뭐가 돼...... 그냥 그만둘까?'
하지만, 불안은 나 스스로 만든 그림자 괴물이었다.
불안할 때마다 그것을 이기는 묘책이 있다.
종이 한 장을 꺼내고, 달력을 그린다. 그리고 계획을 세운다. 연/월/주/일로 나누어 거시와 미시가 격자로 팽팽하게 촘촘한 계획을 세운다. 물론 실천은 내일부터다. 그러면 오늘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날이 된다. 덤으로 얻은 것 같은 오늘 하루는 부담 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뽑아서 할 수 있고 기분이 좋아진다. 내일에 대한 기대감도 희망으로 차오른다.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학습 계획표> 나에게 맞는 양식을 만들어서 출력해 썼다. A4 한 페이지는 1주일 분량이고 한 시간 단위로 쪼개서 계획하고 실천했다.
목적에 따라 여러 종류의 암기 노트를 만들었다. 가장 큰 A4지 4장 분량을 붙인 노트부터 손바닥만한 메모장까지 공부하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필요한 노트들을 여러 개 만들었다.
임용시험은 교육학 논술이든 전공 논술이든 맥락이 가장 중요하다. 단편적 암기를 하면 풍부한 문장을 못 쓴다. 이해가 되어도 문장으로 쓸 때는 백지 상태가 된다. 이해하고 넘길 수 있는 이론도 막상 쓰려고 하면 막힌다. 내가 읽은 모든 글을 다 외워야 한다.
그래서 노트도 용도에 따라 여러 권을 만들었다. 노트에 손글씨로 필기하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쓰는 것과 동시에 외워야 한다. 나는 필기 강박이 있어서 내용이 지저분하게 추가되면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서 써야 한다. 이것도 병이다.
1. 정식 공부용: 책상에 앉아서 한 눈 보기 할 수 있게 A4지 4장 분량을 이어 붙인 대형 사이즈 노트
2. 서브 공부용: 아이들을 재울 때, 설거지나 청소 등 집안일 할 때 가볍게 들고 볼 일반 사이즈 노트
3. 틈새 공부용: 아이들을 데리고 어린이집을 오갈 때, 아이들과 놀이터, 장 볼 때 등 이동할 때 공부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의 메모노트
주간 학습 계획표와 요약정리한 여러 권의 내 노트들
대개의 합격자들은 저마다의 비법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모르는 것이 생각나면 박차고 일어나서 바로 봤다던가, 하루 15시간의 공부시간은 반드시 지켰다던가, 전체 공부 10회전은 꼭 했다던가. 앞에서 짧게 언급했듯이 나도 나만의 원칙이 있었다.
1.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서둘러 집에 돌아온 후 매일 아침 9시에 혼자 모의 논술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그냥 시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침 8시 50분부터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시험장의 살벌하고 차가운 정적 상황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9시 정각에 알람을 크게 맞춰놓고 눈을 감고 대기하다가 9시 알람 종소리와 함께 처음 보는 논술 답안을 썼다. 1시간 교육학 논술은 45분에 마치는 연습을 했고, 3시간 전공 논술은 2시간 20분에 맞춰 연습했다. 지금은 현장이고 이건 실전이라고 매번 상상했다. 매일의 이 루틴을 시험 직전까지 6개월간 매일 실천했다.
매일 아침 실전처럼 논술시험 모의 연습을 했던 나의 답안들. B4지로 1000여 장이었다.
혼자 모의고사를 치른 후 첨삭했다. 이렇게 스스로 격려해 주기도 했다.
매일의 루틴이었던 교육학과 전공 논술시험 모의 답안지
2.가짜 독서를 경계했다. 내가 읽고 있는 내용이 온전히 머릿속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책을 덮고, 백지에 책의 모든 내용을 빠르고 정확하게 옮길 정도로 이해하고 암기했다. 6시간을 공부하면 실제 공부를 한 시간이 5시간 50분은 생산되도록 1분의 멍함도 경계했다. 메타인지가 중요했다.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내가 모르는지 아는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위험했다. 잠시 딴생각이 스며들려고 하면, 바로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지금도 나의 보물이다.
임용시험은 논술시험이라 이론의 징검다리가 되어줄 단어 연결이 핵심이었다. 색을 달리 해서 빠르게 볼 때는 검은색, 꼼꼼히 볼 때는 황토색의 부연설명까지 보도록 계획적 필기를 했다.
나는 디자인 전공이었기 때문에 동서양 미술사를 배우거나 공부해 본 적이 없었다. 디자인사도 단편적으로 접해 임용시험에서 다루는 내용들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교육대학원에서도 미술교육의 방법론과 교수학습 평가, 미학 비평에 대한 수업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임용시험 공부에는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는 학업이었다. 겨우 그 정도 수준으로 미술을 좋아하기만 했던 일반인 나는 겁도 없이 미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누군가는 그랬다.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1년 6개월 공부해 본 수험생 입장으로는
시험에 있어 운은 없다는 것이었다.
임용 수험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영역은 '교육과정'이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외울 엄두조차 나지 않는데, 법전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인용해야 한다. 이 영역을 포기하면 3점 가량을 버려야 한다. 이 영역은 외워도 외워도 까먹게 되는 계륵 같았다.
이런 교육과정 중 누군가는 교수-학습 방법에 자신이 있고, 누군가는 지도법에,누군가는 평가에 자신이 있다. 내가 완벽히 외운 분야가 시험에 나오냐 안 나오냐가 운이었다.
불운을 원천적으로 소거해야 했다.
매일 2시간씩 시간을 할당해깨알 같은 60페이지를 전부 외웠다. 노래로 만들어서 자면서도 외웠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어떤 챕터라도 제목만 누르면 바로 자동 인출될 만큼 뇌에 새겼다.
시험에 있어 운은 없었다.
12월 첫째 주 토요일 실전 시험을 앞두고, 마지막 석 달 동안은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2시간이었다. 식사시간도, 수면시간도 따로 없었다. 100일 동안은 밤잠을 포기했다. 내내 공부를 했고 미치게 졸릴 때만 책상에 엎드려 15분 토막잠을 잤다. 하루만 누워서 자는 것이 소원이었다.
스스로 정한 논술시험은 중간에 끊으면 1회의 모의시험이 날아간다.꼭 1회분의 모의시험은 끝내는 걸 원칙으로 정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엄마를 간헐적으로 찾다가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이 같이 울어댔다. 공부 때문에 마음이 조급하면서도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정신적으로 무척 괴로웠다. 아이들과 하루 종일 엉켜 생활도, 육아도, 공부도 모든 것이 힘들었다.
11월이 왔다.
이제 다 왔다. 이젠 정말 끝이다.
4주만 지나면 이 모든 것들이 다 끝난다.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이젠 중요하지가 않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끝날 것 같지 않던 하루하루가, 날카롭고 지친 날들이 이제 겨우 달력 한 장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어떤 시험이든 기출문제 분석은 가장 중요하다.기출문제를 분석하는 것에도 중요한 원칙이 있다. 출제자의 마음으로 영리하고 효율적으로 기출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하지만, 이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분석을 해야 하는지 감을 잡기는 어렵다. 시간이 걸리고 귀찮은 일이지만 3일만 날을 잡고 아날로그 방식으로 몰입하면 문제의 흐름과 경향, 중요한 것이 매직아이처럼 떠오른다. 마치 바다의 깊이에 따른 생물들의 서식지가 한눈에 보이는 것과 같다. 이 과정에서 생물의 종류에 따른 포획방법 역시 드러나므로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다.
1. 20년 간의 기출문제를 모조리 출력해서 한 문제씩 모두 오려낸다.
2. 그걸 영역별로 분류하되 시험 연도대로 A4지에 붙인다.
3. 문제를 풀지 말고, 문제의 키워드만 형광펜으로 칠한다.
4. 영역별로 모아 클리어 파일에 넣고, 영역 인덱스를 써서 붙인다.
5. 표의 가로에는 기출 연도를, 세로에는 각각의 영역을 쓰고 각 칸에는 출제된 키워드를 기록한다.
6. 매일 공부하기 전, 오늘 공부할 영역의 기출문제를 찾아 형광펜 칠한 단어만 숙지한다.
7. 공부 중 기출 된 부분이 나오면 초집중하게 되며, 맥락과 배경 내용까지 살을 붙여 공부한다.
[위] 역대 기출 문제의 시제를 영역별로 메모한 것 / [아래] 논술로 바뀐 해부터의 시제 정리, 이를 토대로 그 해의 출제문제를 예상했고 실제로 형광펜 부분이 시험에 나왔다.
매일 이런 과정을 거쳐 공부했을 때, 나도 모르게 훈련되는 것이 있었다.
1. 일단 점수에 가산 안 되는 문장은 과감히 버린다. 문제가 묻고 있는 것만 문제 의도에 맞게 정확하게 쓴다.
(큰 시험 앞에서는 불안하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내용을 다 쓰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가점이 안 되는 단어와 문장은 과감히 버리고 시간 확보부터 해야 한다.)
2.답안을 쓰는 시간이 놀라울 만큼 단축된다. 머릿속에 개요가 그려지기 때문에 초고가 필요 없다.
3.퇴고의 과정에서 3~5점을 높일 수 있는 단어로 교체가 가능해진다. 일단 큰 골자를 서술해 놓고 퇴고할 때 점수를 올릴 키워드를 문장부호로 곳곳에 끼워 넣는다. 핵심 문장으로 이미 골자를 세워놓았기 때문에 중언부언이 없고 안 써도 될 걸 괜히 써서 틀린 서술로 감점되는 불상사도 막을 수 있다.
초시 때의 나처럼 시간을 탓하면 안 된다. 부족한 시간은 기회다. 부족한 시간은 방법을 영리하게 만든다. 시간이 부족하니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게 된다. 시간에 쫓기니 공부의 밀도는 단단해지고 영리해진다.
드디어 실전 시험을 10시간 앞둔 D-1일 밤.
내 인생의 마지막 논술 연습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내 머리가, 내 마음이, 그리고 내 손이 기억하고 있다.
그동안의 내 노력을 믿고, 후회 없이 끝내고 오자.
D-1일. 나의 마지막 논술 모의시험 답안지. 4년 간의 나의 노력이 끝나기를 바랐다.
D-1일 밤. 실전 시험일을 하루 앞둔 마지막 밤, 마지막 공부를 마치며. 실전 시험이 끝난 다음 날에 마음 편히 미용실에 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함에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각 교과마다 한 해 몇 천명이 응시하는 시험이었다. 40명 가까이 되는 고사장에서 1등을 해도 합격의 가능성은 낮았다. 가장 마지막까지 답안을 썼다. 시험 종료령이 울렸고 고개를 들었다. 감독관이 내 답안지를 걷어갈 때 다른 사람들의 답안지를 봤다.내 답안지가 가장 빽빽한 게 확인되자 갑자기 울컥했다. 모두 돌아간 시험장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초시 때는 미련의 눈물이었고,
재시 때는 후련의 눈물이었다.
합격자 발표날, 10시에 접속이 되지 않았다. 1년 넘게 매일 같이 공부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 나보다 열 살 어린 친구들과 통화를 했다. 셋 다 주민번호를 입력해 놓고, 무서워서 마지막 <확인>만 클릭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니! 나 합격했어!"
"언니! 나도 합격이야!"
단 3명만 뽑는 고향 지역 시험에 응시했던 친구는 2차 시험을 준비하는 내내 몹시 불안해했다. 1차를 커트라인으로 합격했기 때문에 2차에서 뒤집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2차에서 만점에 가까운 괴물 점수를 받았고 무려 수석 합격이었다. 다른 한 친구 역시 차석이었다. 초시에서 셋 다 나란히 떨어졌던 우리 스터디는 전원 이 안내문을 받았다.
" 선생님의 최종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
나도 내 성적표를 확인했다.
교육학 논술에서 실수를 해 크게 점수가 깎였지만 만족할 만한 점수였다.
1차 -전공 논술(80점 만점): 74.33점
교육학 논술(20점 만점): 16점
2차 - 실기 두 과목(30점 만점): 28점
수업지도안 (10점 만점): 9.82점
수업실연 (20점 만점) : 19.67점
구술시험(40점 만점): 37.33점
초시 때 1점도 안 되는 점수로 탈락했던 시험에서
합격 커트라인을 25점이나 넘긴
185.15점으로 최종 합격했다.
1차 전공논술,2차 실기 모두 수석이었고,
역대 최고득점, 전국 수석이었다.
실제 임용시험 최종 성적표
미술교육대학원에 걸린 합격자 플래카드. 10년을 공부하고 합격한 선생님도 있었다. 우리 지도 교수님이 이 플래카드를 손수 챙겨 간직하라며 나에게 직접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