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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Kim Oct 24. 2021

[#학부모] 학부모는 민원인, 교사는 사과봇

담임이라서 죄송합니다.

물론 일부의 사례다.

그러나 20%의 몰상식한 학부모는 일당 백이다. 

25명 담임반 학부모 중 3~4명은 매년 등장한다.



그런 학부모 한 명을 만나면 일 년이 괴롭다.

매년 한 두 명 정도는 뉴스에나 나올 법한 수준이다.

많은 사람 유형이 다 모이는 게 학교다.

사회의 축소판으로 모인 불특정 다수  매년 꼭 한 명씩은 등장한다. 학교가 아니었다전혀 만날 일이 없을 사람들이다.



3월, 첫 학부모 상담주간의 피로도는 몹시 크다.

어디서 어떤 성향의 학부모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이때는 첫 대면이라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담임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찾아온 학부모들이 다음 통화나 만남에서 몰지각한 행동을 할 때는 대부분 담임이 이런 사람일 경우다.

담임이 젊은 여교사이거나, 순하거나, '비주류' 교과일 때. 나는 셋 다 해당된다. 담임이 남자 교사거나 부장교사거나, 국영수 교사일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평범한 우리는 대부분이 학부모이다. 나 역시 학부모이다. 학부모라는 신분 자체를 특정 짓는 것이 아니다. 어딜 가나 있는 사람, 예컨대 식당에서 갑질 하는 사람, 백화점에서 진상 부리는 사람, 택시에서 행패 부리는 사람, 길 가다 시비 거는 사람  그들도 학교로 오면 학부모가 된다.



더 미치는 건 본인은 의식 있는 사람이라며 논리를 갖춘 듯 지속적으로 트집 잡는 부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담임에게 무리한 요구로 갑질 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들은 특징이 있다.

"나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에요! 내가 이런 사람이에요!"

 내지는 "내가 아이 키우다가 담임에게 이렇게까지 하기는 처음이에요!"라는 말을 꼭 한다.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고 담임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른 적도 없던 정상적인 사람인데, 내가 이렇게까지 처음으로 한다는 건 담임 당신이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를 반드시 어필한다.




학급의 약한 아이를 지속적으로 따돌린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문제로 학교폭력대책위원회가 몇 번이나 열렸었고, 중학교 때는 경찰 조사도 받았다. 고등학교 와서도 가해자 신분으로 학폭위가 열리자 그 학부모는 역으로 그 반의 90% 아이들과 담임교사까지 가해자로 대거 고소했다.



 학부모의 주장은 담임교사가 주도하여 학급 아이들 모두를 포섭해 자신의 아이를 조직적으로 따돌렸다며 고소 내용을 둔갑시켰다. 교육청에서 감사가 나왔고 비밀리에 학생들, 학부모들, 교사들, 부장교사, 교장, 교감에게 해당 교사에 대한 진술을 받아갔다. 20명 가까운 아이들과 담임교사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긴긴 답변서와 함께 몇 개월이나 지독한 시간을 겪었다.



교감은 해당 담임을 불러 말했다.

"교육청에서 비밀리에 조사가 나와서 많은 학생들, 학부모님들, 교사들로부터 진술서를 받았다. 비공개 사항이라 선생님에게 보여줄 수는 없지만 보여주고 싶을 만큼 선생님에게 선물 같은 일색이었다. 선생님이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쳐 오셨는지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일로 더욱 잘 알게 됐다."



그 담임은 4개월 간의 극심한 스트레스로 결국 쓰러졌고 전신 마비가 왔다. 8시가 되었는데도 출근하지 않자 교감선생님은 불길한 생각이 든다며 부장교사와 상담교사를 대동하고 그 담임의 집까지 차를 몰고 갔다. 담임의 자녀들도 학교를 가지 못하고 엄마 옆에서 울고 있었다. 담임은 응급실로 실려갔다. 구토와 실신을 반복했고 며칠 동안 출근하지 못했다. 이후 6개월을 불안장애 약으로 버텼다.



담임은 나였다.

교사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겪은 첫 사례였다. 그 아이가 다른 친구를 따돌리긴 했지만 지금은 학급 아이들로부터 좋지 않은 입장에 놓인 아이가 이번 일로 좋은 사람이 되도록 옆에서 밀착해서 격려하고 보살폈다. 객관적이어야 하는 담임 입장에서 그 아이가 확실히 잘못한 부분에 대해 인지하자 학부모와 아이는 180도로 돌변했다.



결이 곱지 않은 사람에게 마음을 주면 그들의 이익에 따라 내 선의는 흉기가 되어 돌아온다. 모른 척 했다면 당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회사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일이었다. 교실 상황을 한 번도 눈으로 보지 못한 그 학부모들의 고소장에는 처음 보는 내가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직장에서의 고충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생각했었다. 직장을 그만 두지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뉴스에 나올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내 일이 되고 보니 나도 베란다에서 울며 그런 선택을 생각하고 있었다. 교사로서의 자존감과 양심, 일에 대한 자부심,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한 순간에 오물로 뒤덮혔다.


 교사를 그만두자 마음 먹었다. 3 만에.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 수업에서 학생이 수업에 입장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온라인으로 입장해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진도를 나가야 해서 학생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을 때마다 전화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래도 나중에 딴 소리를 할 수 있어서 다른 학생들을 대기시키고 수업에 들어오지 않은 학생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지 않아 바로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이 끝나고 다시 전화를 했고 그 아이는 잤다고 했다.



그 학생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가 자고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는데, 엄마한테라도 교사가 전화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고성을 질렀다. 그때 자기가 집에 있었는데 선생님이 전화만 해줬다면 자기가 아이를 깨워서 수업에 들여보냈을 것 아니냐며 전화기가 터져나갈 듯이 폭언과 고성을 질러댔다.



퍼붓는 인격모독과 모욕의 수위는 뉴스에서 보았던 대한항공 일가의 조현민, 한진 회장 부인 이명희 같았다. 아이가 1교시 수업을 빠진 걸 어떻게 하루도 안 지난 그날 오후에 벌점을 줄 수가 있느며 이성을 잃었다. 지나간 수업에 대한 처리를 당일에 하든 다음 날 하든 문제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몇 시간씩을 괴롭혔다.



자신은 갱년기라 수시로 화가 뻗치고 마음이 힘들다며, 안 그래도 이렇게 힘든데 왜 선생님이 우리 아이에게 한 소리를 했냐며 수화기가 터질 듯이 소리를 질렀다.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의 과오 보다 교사를 탓한다. 옆에서 참담하게 지켜보고 있던  부장 선생님이 전화를 이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 내내 두 교사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사람의 일이다. 사람에게는 언어가 있다. 언어에는 품격이 있다. 현명한 학부모였다면 아이의 학교생활을 위해서 담임교사에게 저런 언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학부모의 특징은 굉장히 장황하고 반복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피력한다. 교사에게 변명하라 해놓고 절대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말할 틈을 주지 안 듣는다. 자기 감정만 토해낼 목적이다. 또, 자신이 직접 보지 않은 상황에 대해 마치 목격한 것처럼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항의한다. 자신이 겪은 일처럼 믿어버리며 억을 점점 부풀린다. 점점 더 높은 수위로 찢어지는 폭언을 퍼붓는다. 명백한 폭력이다.



교권보호위원회를 열어도 막을 방법이 없다. 가해자가 학생일 경우에는 처분을 할 수 있어도 가해자가 학부모일 경우는 해당인이 출석요구서를 간단히 무시해 버리면 어떠한 조치도 할 수가 없다. 분노조절이 안 되는 사람을 자극하고 기름을 붓는 격만 될 뿐이다. 결국 다치고 상하는 건 교사다. 더 큰 화를 당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덮을 뿐이다. 매 순간 트라우마와 싸우며 아이들을 만난다. 그 학부모의 찢어지는 폭언은 마음속에 강하게 새겨져서 매일같이 떠오르며 나를 괴롭힌다.



교육청 교원치유센터를 통한 상담치료를 몇 개월 간 받았고 2년도 지나지 않아 정신의학과에서 불안장애 약을 또 먹어야 했다. 겨우 넘어 와서 다시 시작하려는 문턱 앞에서 또 한 번의 폭력을 당했다. 아직도 매일 그 목소리가 떠오르고 심장이 컨트롤 되지 않을 만큼 뛴다. 조례와 종례를 들어갈 때, 수업을 들어갈 때마다 숨이 막혔다. 그래도 아이들 앞에서는 티가 나면 안된다. 억지로 밝은 척 연기를 하고 매일 연기를 한다.



회사 다닐 때도 사회생활을 잘 해왔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았고 일도 놓치지 않았다. 태어나 한 번도 정신의학 관련 치료나 약을 먹어 본 적도 없었다. 정신에 병이 올 것 같았던 적도 없었다. 학교로 온 지 6년 만에 허리가 꺾이는 교통사고를 두 번 당했다.




학생들에게 안내했던 내용을 매번 문자나 전화로 짜증스럽게 되묻는 학부모도 있다. 자신의 아이가 못 챙기는 것을 담임 탓을 한다. 아마 초등학교, 중학교 때도 그랬을 것이다. 매번 말을 안 듣고 교칙을 위반하는 학생이라 따로 챙겨주기까지 하는 아이다. 학부모에게 자세히 알려주면 감사하다는 답장이나 인사말 한 마디 없이 끊는다. 단 한 번도 고맙다는 형식적 인사도 없다. 담임은 심부름꾼이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힘이 빠진다. 날카롭게 짜증을 내고는 있지만 폭언은 아직 안 나왔기 때문이다.



담임을 자기 아이의 비서로 생각하는 학부모도 있다.

"오늘 우리 아이 생리 결석합니다." (생리 결석은 월 1회 출석으로 인정되니 당당한 권리로 담임에게 통보한다.)

"누구 엄만데요, 생기부 출력해서 팩스로 보내주세요."

"오늘 저희 아이 코로나 백신 맞습니다. 모레까지 등교 안 합니다."

"저희 아이가 벌점이 많습니다. 왜 그런가요?" (본인이 직접 학교 앱으로 들어가서 간단히 확인하면 될 일도 담임에게 캡처해서 보내달라고 한다.)

"오늘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아침을 안 먹고 갔습니다. 점심시간에 급식실 가서 밥 먹는지 한번 봐주세요."

이 정도는 평이한 통보, 요구다.



학생이 운동으로 진로를 정했다며 얘한테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수업을 빼 달라는 막무가내 요구도 있다. 결석한 걸 등교한 걸로 해주는 건 불가하다고 하니 전학 갈 학교를 알아봐 달라고 한다. 말문이 막혔다. 이사를 가야 전학이 되니 어디로 이사 가실지는 학부모님이 직접 알아보셔야 한다고 말했다. 담임이 학생의 진로를 위해 하는 일이 뭐가 있냐며, 학부모가 학교를 어떻게 알고 전학을 알아보겠냐는 민원도 있다.



담임에게 전화해서, "탐구교과 선생님에게 수업 좀 열심히 하지 말아 달라고 해주세요."라는 부탁을 하는 학부모도 있다. 내신에 들어가지 않는 교과이니 수업 좀 열심히 하지 마시고 자습시간 좀 달라며 아이가 학원 숙제할 시간이 없다는 얘기를, 해당 교과교사에게 전해달라며 담임에게 정중하게 부탁한다.



여학생은 한 달에 한 번 생리결석이 된다. 이를 악용하여 매달 결석하는 아이가 있다. 생리 결석한 아이에게 결석계 서류 제출을 안내했더니 학부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의 아이가 생리 결석을 하긴 했지만 학급 친구들 앞에서 '생리'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는 민원이다. 여학생인데 '생리'라는 단어를 직접 들으면 얼마나 수치심이 들겠냐며 담임이 조금 더 세심했어야 하지 않냐며 짜증을 낸다.



자신의 아이가 다른 교과 시간에 결과 처리 되었는데 담임은 뭘 하고 있었냐며 문자로 따진다. 결과 처리는 담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시간의 교사가 하는 것이고, 학생이 수업을 빠진 건 기정사실이니 번복 불가하다 해도, 일단 가장 만만한 담임을 붙들고 자신의 화를 성토부터 하고 보는 학부모가 많다. 그나마 미친 사람처럼 고성을 지르며 분노조절 못 하는 학부모를 생각하면 이 마저도 고맙게 여겨진다.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여기에 있지?'라는 자괴감.

나는 일을 할 뿐인데

교사라는 이 직업은 대체 뭘까? 매일 고민한다.

담임은 심부름센터 직원이면서 콜센터 직원이자 민원처리반, AI 사과봇이다.





선배 교사들은 조언한다. 자신이 겪은 일을 후배 교사들이 당하고 있는 걸 보며 우리는 이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이 직업의 가치에 대해, 직업인으로서 교사의 사명에 대해 현주소를 생각해 본다. 신신당부의 내용은 이렇다.



1. 무조건 즉답을 피할 것.

   답을 빠르게 해 주면 계속 물고 늘어진다. 점점 부당한 걸 요구하거나 교사의 잘못으로 뒤집어 씌우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결국 맨몸으로 화 받이가 되는 건 담임이고 치명적 손상을 입는 것 또한 교사다.



2. 무조건 원칙만 로봇처럼 말할 것.

    몰지각한 학부모들은 조르고 귀찮게 하면 학교에서 다 받아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어떤 변수를 묻더라도 무조건 원칙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말을 아낄 것. 돕고 싶은 마음에 친절해 버리면 담임에게 붙게 되고 그럴 경우 교사의 친절한 말을 가능성으로 돌변시켜 '담임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책임져라.'로 전복되어 돌아올 수 있다.



3. 다 들어주지 말 것, 친절하지 말 것.

    딱딱하고 차갑고 어려운 담임이 되어야 학부모들은 무리한 요구를 강요할 때나 억지 주장을 펼칠 때, 눈치 보는 척이라도 한다. 담임교사들은 가장 만만한 대상이라 호구되기 십상이다.



이건 3번을 빼면 흡사 관공서나 민원센터의 공무원이 연상된다. 콜센터 상담직원도 연상된다. 그들도 이러한 처세를 방패 삼아 스스로를 최소한으로 지키는 방어가 되었을 것이다.



교사들은 가슴속에 매일 사직서를 품고 있다.

언제든지 최악의 학생과 학부모를 만날 불안한 가능성을 예비하고 있다. 교원단체에서 변호사 등 지원을 해준다 하더라도 몇 년 간의 고통스러운 상처는 고스란히 교사 본인이 오롯이 감당해 내야만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싸우고 견딜 자신이 있는 교사는 누구라도 없다.

언젠가는 최악의 경우를 사고처럼 당할 수 있는 게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며 하루를 넘기고 올해를 넘긴다.



학교 밖의 일반인이었을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생각이다.



학교는 거대한 판옵티콘이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고안한 원형 감옥에 비유해 푸코는 학교를 판옵티콘이라 했다. 즉 권력자들이 자신을 숨기고 피권력자들을 한 눈에 감시하기 위한 장치가 학교에서도 해당되는 체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요즘 그 안에 갇힌 건 학생들이 아니라 교사들이다. 교사는 피권력자 신분에 가깝다.

그게 학교의 씁쓸한 현 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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