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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Kim Oct 24. 2021

[#학부모] 당신은 어떤 학부모입니까?

가장 좋은 학부모란

교사들이 공부 잘하는 아이를 좋아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내 생각도 그랬다.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 가장 예쁠 줄 알았다.



여기서 '모범생'이란 말을 정의해 볼 필요가 있다. 사전적 의미의 '모범생'은 '학업이나 품행이 본받을 만한 학생'이다. 교사들이 보기에 모범생이 안 예쁠 리 없지만 사전적 의미의 모범생과는 조금 다르다. '학업'이 빠진다. 그저 '품행이 본받을 만한 학생'만으로도 가장 애정이 간다.



공부를 잘하고 못 하고는 조금의 이해 관계도 없다. 오히려 공부만 하는 아이들이 사회성이 결여되고 이기적 얌체일 경우가 많다. "저 아이는 마음이 따뜻하고 배려심이 많아요. 그런데 공부도 잘해요." 이런 경우는 있어도 "이 아이는 공부를 잘해요. 그런데 착하기도 해요."라고는 좀체 표현되진 않는다.



더 예쁜 아이는 착하고 질서를 잘 지키고 예의가 바른데 웃기기까지 한 아이다. 이런 아이는 반 안에서 친구들로부터 가장 큰 인기를 받는다. 사회성 좋고 융통성 있고 유머가 있는 아이는 교사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는다. 지금 우리 반에도 그런 아이들이 있다. 매일 만날 때마다 반갑고 고맙다. 기특하게도 담임에게 용기를 주는 말도 많이 한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 아이들인데 의외로 세상을 보는 포용력이 넓고 통찰력이 있음에 깜짝 놀란다. 나의 힐링 포인트다. 그 아이들의 학부모님들에게 매일 감사하다.



순하고 얌전하고 착한 아이가 있다. 뭘 해도 예쁘고 돕고 싶은 아이다. 그런데 그 아이의 엄마와 통화하고 나서는 아이를 다시 관찰하게 됐다. 엄마가 말이 너무 날카롭고 담임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원래 말투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원래 그렇다 하더라도 존중은 배어 나오기 마련이다.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본인이 할 말만 속사포처럼 하고 끊을 때도 인사 한 마디 없이 이렇게 하라는 통보를 던지듯 말하며 끊었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미워지는 건 아니다. 여전히 좋은 아이다. 어른의 매너가 씁쓸한 뿐이다.



한 번은 솔선수범하는 바른 아이의 어머니가 상담을 오셨다. 약간은 긴장된 조심스러운 대화를 시작했다. 아이에 대해 담임으로서 관찰한 것, 있었던 일들, 수업태도, 아이와 나눈 대화들을 말했다. 멋진 아이라 당연히 칭찬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이 몰랐던 딸의 세세한 모습에 흥미로워하며 받아 적으려고 노트를 펼쳤다. 그런데 노트는 온갖 수학 기호로 가득 차 있었다. 조심스레 이게 뭐냐고 묻자 그 어머니는 수학과 교수라고 했다. 그때부터 아이보다는 일하는 엄마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같이 세상 사는 이야기로 번져나갔다. 친근한 동네 주민을 만나 이런저런 정겨운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이 감사했던 적도 있다.





교사가 되기 전에는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담임 상담 기간에는 반드시 상담을 가야겠다고. 담임이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하고, 내 아이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더 정확히는 담임이 보기에 내 아이를 예쁘게 보고 있는지 아니면 미운털이 박히진 않았을지가 걱정됐다. 그리고 엄마가 학교를 가서 담임을 만나고 와야 내 아이가 관심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교사가 되고 담임이 되어보니 전혀 아니었다. 

가장 좋은 학부모란 이런 유형이다.



'내가 모르는 학부모'



만난 적도 없고 전화 통화한 적도 없고 문자가 오간 적도 없는 학부모는 백지와도 같다. 온전히 학생만 집중해서 관찰할 수 있다. 어떤 선입견과 판단의 개입도 없이 순수하게 학생만 보게 된다. 대개의 학생들은 문제없이 교칙을 잘 지키고 생활을 잘한다. 교우관계도 좋고 선생님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행동한다. 학부모 때문에 아이가 더 좋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있다. 어머니를 만나 보니 역시나 어머니도 좋은 분이셔서 '그래서 저 아이가 이렇게 잘 자랐구나'라는 확인이 된 적은 더러 있다. 또, 반대로 아이는 사고뭉치 자유인이라 골치가 아픈데, 어머니가 매번 전화로 미안해하고 서로 존중의 대화가 잘 된다면 골치 아픈 그 아이를 돕고 싶은 마음이 진심으로 우러나오게 된다. 처세나 예의, 생활에 대해 엄마처럼 더욱 잘 가르쳐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현명한 학부모다.



갑질 학부모도 있지만 정말 감사한 학부모도 꼭 있다.

아이가 1년 간 해외로 나가는데 내년에 아이가 학교로 다시 돌아왔을 때도 내가 다시 담임이 수 있는지 가능성을 묻는다. 아이가 우리 샘 같은 담임샘은 다시는 못 만날 것 같다며 해외 가기 싫다고 한다는 말을 전해왔다. 어제는 갑질 학부모에게 당하고 오늘은 선물 같은 상황도 생긴다. 너무 감사하다.



그동안 힘들었던 걸 스스로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내 감정을 꾸역꾸역 누르고만 있었다가 터져버렸다. 교사로서 마지막 자존감도 지키지 못하고 당했던 스스로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생각지도 못한 용기를 준 내 학생과 학부모님에게 감사하게도 큰 감동을 받았다. 이 힘으로 앞으로 내가 챙기고 보살펴야 할 우리 반 아이들을 생각한다.




학부모와 교사는 협력관계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의 잘못에 대해 사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의 아이가 한 잘못은 3인데 사과를 하면 10으로 인정되는 일이라는 착각을 한다. 학부모가 아이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교사들은 아이가 0으로 수렴되게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학부모가 아이의 잘못에 대한 인지가 있으니 이내 그 아이도 좋아질 거라는 믿음이 들기 때문이다. 정말 힘들게 하는 아이여도 학부모가 협조적이라면 그 아이를 돌보는 데 힘이 난다. '한창나이에 이런 아이도 있을 수 있지. 학부모가 이성적 판단이 되니 저 아이도 철이 들면 언젠가는 나아질 거야'라는 희망이 든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아이도 개념과 예의가 없는데 학부모까지 똑같은 경우에는 교사도 포기하게 된다. '저 아이가 왜 저러는지 알겠다.'는 확인만 될 뿐이다. 최선을 다해 도와봐야 '부모가 저런 사람들인데 뭐가 바뀔까. 도움 줘봐야 나중에 어떻게 원망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뭐든 담임 탓을 하는데 나만 다치고 원망 듣겠지.' 싶은 방어기제가 작동될 뿐이다.



교사도 사람이다. 교사는 성직자가 아니다. 똑같은 직장인이고 사회의 일원이다. 언제든지 이슈 삼아 인품을 평가하고 재단해도 되는 당연한 대상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의 학교생활이다. 아이들이 즐겁게 학교를 다니고, 교실에 들어올 때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내 방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올 수 있어야 한다. 반에서 사이가 껄끄러운 친구가 있다거나 담임이 어렵고 싫다면 그 학생은 일상이 지옥일 수 있다. 교실은 내 집 같아야 하고 아이들은 이 공간 안에서 교실 생활이 아닌 다른 걸 고민해야 한다. 친구들과 담임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낯섦과 불편함도 없어야 한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이걸 방해하는 건 다름 아닌 학부모다.

아이들의 마음을 교란시키는 것도 학부모다.

아이들 앞에서 담임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담임을 모욕하고 탓하는 언사를 하면 아이들은 금방 물든다. 불필요한 의심과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담임을 본다. 아무 일도 아닌 걸 문제 삼아 스스로 괴로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아이의 피로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인간관계에서 미성숙하다. 이런 감정들은 어린 학생의 마음속에 피해의식을 키운다. 담임이 마음에 안 들어도 아이 앞에서 학부모는 담임을 담담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의 마음에 선입견이 깃들지 않게 되고 교실에서 어떠한 불편한 감정 없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다.



곧 있을 10월 말의 교원능력평가에서 학부모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담임교사를 재단한다. 악평을 하는 학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벌점이 있거나, 결과나 무단결석이 있거나, 학교에서 벌점을 많이 받았거나, 잘못을 해서 교사에게 훈계 받은 적이 있는 자녀를 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아이가 일반적이지 않은 학부모들이 교사평가에서 악평을 토로한다. 담임과 관계가 좋고 아이 스스로 할 일을 잘하고 바르다면 학부모가 학교에 불만을 가질 일도, 교사를 평가절하할 일도 없다.



이 대목에서 "정말로 담임 선생님한테 저런 언행을 하는 학부모들이 있다고? 설마! 과장이나 비약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좋은 학부모다. 상식적이고 지각있는 어른이다.



학교 대표전화에 녹음 기능이 생겼다. 교육청에서 부여하는 교사 전용 전화번호 앱에도 녹음 안내 멘트가 추가됐다. 둘 다 최근에 생긴 것이다. 학부모라는 옷을 입은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의 이익에 대해 이성을 버릴 때가 많다. 아이의 잘못이 교칙대로 처리되는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행정심판을 제기한다. 처분이 내려지면  담임을 탓한다.  담임이 자기 반 아이의 처벌을 안 막고 뭐 하고 있었냐며 교사의 면전에 칼날을 세운다.



'교권보호를 위해 녹음되고 있으며 폭언과 고성은 삼가 주세요.'로 시작하는 안내멘트가 나온다. 그것을 듣는다면 학부모들의 갑질은 보통의 언어로 변환될까? 자동번역기처럼 학부모의 말이 자동 매너모드로 변환되어 담임의 귀로 전해지는 상상을 해본다.



퇴근길, 화사한 햇빛과는 다르게 무겁고 어둡다.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새겨진 시 한 편이 보였다.




              퇴근길


                                                 김용구 (2020 시민공모작)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가는 길

천근만근 작은 가방 하나


오늘 하루 난 무엇을 위해 일했나

오늘 하루 난 누구를 위해 일했나

멍하니 걸어간다.


알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이어폰 소리를 통해

방금 전까지 접속했었던 세상과 이별하고

오늘도 버텨냈다는 무의식에 안도하며

차고지로 향하는 지하철과 함께

나라는 차의 차고지를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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