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쓸 글감이 있는 날

2025년 4월 16일 수요일

by Mia 이미아

아주 오랜만에 병원 외의 외출을 했다.
오늘은 주 1회 랜덤으로 쉬는 남편의 휴일이었다.
남편이 애플 펜슬이 고장 나서 서비스센터를 예약했고, 가는 김에 같이 나가서 점심을 먹고 오자고 했고, 서비스센터의 위치가 스타필드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지도 같이 데리고 나가자는 말이 나왔다.


지난 저녁, 남편은 내가 잠든 사이에 퇴근을 하고 가지를 미용해놨다. 삽살개처럼 덥수룩했던 얼굴이 예뻐지고, 발바닥 털 정리를 해 미끄러지지 않게 되었다. 스타필드 실내 바닥이 대리석이기 때문에 발바닥 부분 미용이라도 꼭 하길 바랐었다. 외출하는 길, 차 안에서 만개한 벚꽃을 볼 수 있었다.


가지는 들떠서 자꾸 낑낑거렸지만, 내가 영상으로 담으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고 조용해졌다. 여시 같은 거...


조금 늦었기 때문에 주차장에서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비스센터를 향했다. 애기 때 매일 같이 들렀던 산책 코스라서 가지도 매우 신이 났다. 행복해 하는 얼굴을 영상에 담고 싶어서 앞서 가기 위해 조금 뛰기도 했다. 그렇게 5~10분이나 걸었을까. 서비스센터 대기 의자에는 등받이가 없었고, 나는 가지를 안고 힘겹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먼저 휠체어를 빌리러 가자고 했다.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1층 고객센터에서 휠체어를 빌려 앉으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길에도 나는 예쁜 것들을 보면 눈길을 뺏겼고, 때로는 걸음을 멈추고 사진에 담았다.


휠체어에 앉은 후 우리는 서비스센터에 점검을 맡긴 에어팟을 찾기 위해 다시 돌아갔다. 아까 대기 의자에 앉아서 눈으로만 구경하던 커피머신 앞에서 잠시 멈췄다. 남편에게 “예쁘지?” 하고 물으려고 한 건데,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판매원이 나타나서 커피 시음을 권했다.

판매원 언니는 산미가 있는 걸 좋아하는지 고소한 걸 좋아하는지 물어본 후 커피를 내려주었고, 예상 밖으로 맛이 좋았다. 집에서 쓰고 있는 네스프레소 머신이 원가족과 인연을 끊기 오래 전, 이사 선물 같은 것으로 생모에게 받은 것이라 언제고 바꾸려고 벼르고 있었다. 지난번 병원 일이 많이 미안했던지 오늘은 외출도 먼저 제안한 남편이 구매도 먼저 제안했다.


이렇게 우리는 8년 만에 커피머신을 바꿨다.


쇼핑한 물건은 맡겨두고 산책을 나갔다.
올해 첫 봄산책이다.


몰 1층에 때마침 펫푸드 팝업이 있어서 아이들 간식도 사고, 건조해진 가지 발바닥을 위한 프랑스 인증의 안전한 풋케어 제품도 구매했다. 구매 전에 테스트는 해봤지만, 집에 와서 닦여보니 만족스럽다. 강아지의 체온, 심박수, 혈압 같은 걸 측정해서 어플로 정보를 받을 수 있는 기기도 시연해봤다. 가지의 수치는 정상. GPT에게 물어보니 잘 먹고 잘 논다면 피부가 건조해진 것은 영양제나 보습관리로 괜찮아질 거라 한다.


휠체어 외출_02.png


야외 정원.
남편이 한 손으로는 내 휠체어를 밀고 한 손으로 가지를 컨트롤하자니 쉽지 않다. 생존형 결벽증이 있는 나는 (실제 결벽증은 없다, 정신과에 문의해 보았다) 내 손으로 휠체어 미는 것을 꺼리는 편인데, 가지랑 앞서 가라고 하고 바퀴를 천천히 굴려봤다. 어렵지 않은 것 같았는데 곧 방향 컨트롤에 실패해서 다시 남편이 손잡이를 잡았다.


잔디 정원으로 향했다. 가지는 아빠와 저 끝까지 달려 갔다가 냄새 맡고 마킹하고 엄마에게 돌아오기를 두어 번 했는데, 물도 마시지 않고 자리에 앉지 않길래 더 뛰고 오라고 다시 보냈다. 이번엔 남편은 평상에 눕고 가지도 앉는다.

소풍 나온 어린이들이 단체로 나타나서 실내로 다시 들어갔다. 가는 길에 외출 기념 사진을 찍자고 잠시 멈췄고, 가지는 만족한 듯 화단 흙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깔끔 떠는 애가 실외에서 엎드린 걸 보면 우리 부부는 너무 좋아한다. 행복하고, 신나게 잘 놀았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휠체어 외출_01.png


외식하기엔 내가 너무 지쳐서 디저트로 먹을 케이크만 사서 집으로 가기로 했다. 중간에 화장실에 들렀는데, 어차피 휠체어도 탔겠다, 문도 열려 있겠다, 가족 화장실로 들어갔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고 천천히 나왔는데, 문을 여니 애기를 안은 젊은 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민망해졌다.


통증이 있는 아랫배를 잡고 천천히 휠체어에 앉는데 이번엔 휴게 의자에 앉은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걸을 수 있는 젊은 여자가 휠체어에 타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까 봐둔 딸기 초코 쉬폰 케이크를 사러 갔다. 케이크를 포장하고는 카페 테이블 앞에 휠체어를 고정해 달라고 하고, 남편에게 아까 구매한 커피 머신을 찾아 오라고 했다. 엄마 휠체어 때문에 유모차를 가지고 오지 못한 가지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대편 의자에 올라가 앉는다. 원래 내려오라고 해야 하는데, 나도 힘들고 지도 힘들 것 같아서 그냥 두었다. 사실 발자국조차 남지 않는데 규정이 그렇다니까.


집에 온 후엔 간단히 라면을 먹고, 메인으로 케이크와 새 커피머신으로 내린 아이스 커피를 마셨고, 침대에 기대어 미드를 보다가 곧 잠이 들었다. 허리와 골반, 다리 통증 때문에 허리 베개를 베고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밤 10시. 지금도 통증이 있고, 다리 저림이 심하다.
아마 아까 잠시 뛰었던 게 무리였을까.

며칠 전 모 대학병원 신경외과 의사는 MRI를 자세히 보지도 않고, 내 척수 낭종이 증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다고 잘라 말했는데, 그건 거짓말이거나 실력이 없는 거라는 걸 안다.

남편은 이젠 멀더라도 여러 병원을 찾아가고, 여러 의사를 만나보자고 했다. 집 앞 외출도 버거운데 벌써부터 부담스럽다.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이 실망을 해야 할까... 병원 투어 전에 마음을 충전할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하루는 증상이나 통증으로만 꽉 채워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내 일기에 색이 들어왔다. 병원이나 증상 이야기가 아닌 걸로 페이지를 채울 수 있는 날은 참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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