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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나를 주저앉히는 순간

"정상입니다"

by Mia 이미아

“검사 수치는 정상입니다.”


검사 결과는 그렇게 말한다. 진단명도 치료도 없다. 당신은 정상입니다, 그러니 진료실에서 이만 나가주세요. 하지만 내 몸은 매일 날카로운 경고를 보낸다. 피로, 통증, 저림, 식욕 저하, 이제는 가끔 배뇨 장애까지. 나를 1년 이상 가까이 지켜본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내가 쇠약해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걱정한다. 그 모든 증상은 실재하지만, 진료실 안에서는 수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나는 의사의 도움을 구하러 왔지만 기계와 수치 앞에서 내 증상은 연기처럼 흩어진다. 진료실은 고통을 증명해야만 치료받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고, '정상입니다'라는 그 말은 내가 증명을 실패했다는 판결처럼 느껴진다.


그 한마디에 더 깊은 무력감과 고립감이 찾아온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느끼는 이 고통은, 설명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숫자가 말하지 않으면, 궁금해하지도 않는 구조. 이곳에서 나는 환자가 아니다. 그냥 수치 안에 갇힌,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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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괜찮다고 말해왔다. 진짜로 괜찮아서가 아니라, 설명하기 어려워서. 말하는 게 피곤해서. 아프다는 말을 꺼냈을 때 되돌아오는 질문과 조언, 당혹스러움과 거리감. 그 모든 게 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어디가 아픈데?”, “그럼 왜 병원에서는 이상 없대?”, “스트레스받아서 그런 거 아냐?”, “운동은 해봤어?” 같은 질문들은 내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게 아니라, 합리화하거나 해명하라는 요구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통증을 숨기고 참으며 버티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도록,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그렇게 고통은 더 깊숙이 숨겨졌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곪아갔다.


나의 몸에 대해 길게 설명하지 않는 버릇은 방어기제였다. 관계가 불편해지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고, 나를 덜 지치게 하기 위한 생존의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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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진료실 안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정상입니다”였다. 그 말은 언제나 수치로 정의되는 검사 결과를 근거로 하며, 나의 감각과 고통은 뒤로 밀렸다. 그 말에 지쳐서 10여 년 동안 병원에 발길을 거의 끊기도 했다.


오늘 신경외과에서의 진료도 그랬다. 나는 명확한 증상과 검사 결과가 있었지만, 돌아온 말은 “그렇게 생각하고 신경을 쓰면 통증이 더 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였다.


그 말은 무심하게 내 고통을 부정했다. 증상이 분명하고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 있어도, 수치가 ‘정상’이면 그 모든 고통은 환자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처럼 취급된다. 그래서 환자는 진료실 안에서조차 ‘스스로를 입증해야 하는 사람’이 된다.


오늘은 의사의 말이 무례하지 않고 조심스러웠을 뿐, 설명되지 않는 고통은 다시 ‘나의 책임’이 되었다. 그래서 '정상입니다'라는 한마디가 환자에게 가장 폭력적인 문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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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경험을 한 의사의 고백도 있다. 2021년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인터뷰였다. 인터뷰의 주인공, 존스홉킨스 정신과 교수이자 의사인 지나영 박사도 '자율신경계 질환'을 진단받기 전까지 오랫동안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의심받고, 입증해야만 했다.


“나는 분명히 병리적 이상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모든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다. 정상이란 말은 곧 ‘병이 없다’는 의미였고, 사람들은 내가 일을 피하려 엄살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만성피로증후군자율신경계 이상이라는 희귀 질환을 수개월의 시행착오 끝에 겨우 진단받았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수없이 자신의 고통을 설명해야 했고, 심지어 그녀 스스로가 정신과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진료한 열댓 명의 의사들 중 상당수가 "혹시 불안장애나 우울증이 아닐까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의사로서 환자를 보던 자리에서, 자신이 환자가 되었을 때 겪은 이중의 단절감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로 남는 동시에 환자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들어줬다.




지나영 교수는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아픈 게 더 힘들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겉으로 봤을 때 그는 말짱해 보였고, 각종 검사 수치도 정상 범위였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그의 고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편조차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좀 줄이고 기운 내서 일어나 봐라”라고 말할 정도로, 주변에서는 그가 의욕 부족이나 마음의 문제로 드러눕는 것이라 오해했다. 실제로 일터를 쉬고 누워만 지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누구보다 일에 열정적이었던 그는 주변의 이런 시선에 극심한 억울함과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의학의 한계는 존재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그 한계를 ‘환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시스템이다. 그녀는 “내가 모른다고 해서 그 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정말 많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특히 면역계와 자율신경계처럼 복잡한 분야는 세계의 석학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실정이기에,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투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지나영 교수는 자신의 이야기가 이런 면역-자율신경계 질환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환자들이 “나만 이상한 게 아니구나” 하고 용기를 얻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으로 의료진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환자의 호소에 귀 기울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환자 케어에 있어 겸손과 공감의 가치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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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진료실에서 다시 한번 무너졌다.

통증을 부정당하자 잠시 말을 잃었다. 숨이 멎는 듯했다.

“정상입니다”라는 말 앞에서, 더는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순간들 앞에서. 그럴 때마다 내 속에서는 오래된 피로가 밀려온다. 나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당했던 트라우마와 함께. 나를 부정하는 말이 상처가 되려는 그 찰나,


나는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내 증상은 기분 탓이 아니라 실재한다.”


이건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기 위한 작은 버팀목이다. 정상 수치라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지우지 않기 위한 저항이다. 이제는 그다음 말을 듣고 싶다. “정상입니다”라는 말 대신, “그런데 당신은 어떤 고통을 느끼고 있나요?”라고. 그 질문 하나가, 우리가 외면했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왜 내가 한국에서 만난 의사들은 증상을 묻지 않고, 물어도 듣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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