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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콘을 만난 적이 있다면

좋은 의료진이라는 희귀종

by Mia 이미아

좋은 의료진을 만난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그는 환자를 ‘검사 수치’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했다. 그 한 사람의 태도는 의료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줬다. 지금은 그 병원도, 그 사람도 사라졌지만, 그 시간은 여전히 내게 잊히지 않는 기준으로 남아 있다.


지금의 의료 시스템에서 환자는 데이터가 되었고, 진료는 효율로 평가된다. 병원을 오가다 ‘진짜 환자’로조차 인정받지 못할 때면, 그 시절이 오히려 비현실처럼 느껴진다. 그건 한 개인의 행운이었을까, 아니면 시스템이 이토록 망가진 걸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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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경 이후로 줄곧 생리불순에 시달렸다. 심할 땐 몇 달씩 하혈이 지속되었고, 안 그래도 마른 몸에 빈혈이 심해졌다. 그렇게 나는 또래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산부인과 문을 두드렸다. 다니던 여고 바로 옆, 규모가 꽤 있는 개인 산부인과에 경험 많은 할머니 원장님이 계셨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그분은 내 인생의 ‘유니콘’이었다.


검사 결과로는 별다른 이상이 나오지 않았다. 혈액검사, 초음파, 호르몬 검사에서도 명확한 진단명은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원장님은 내 몸에서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셨다. 반복되는 하혈과 무력감, 생리주기의 무질서함을 임상적으로 판단하시고, “다낭성난소증후군에 준해서 치료를 해보자”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시작된 약물 치료는 1년 넘게 이어졌다. 피임약 기반의 호르몬 치료였고, 꾸준한 관찰과 조정이 병행되었다. 그 후, 내 생리주기는 지금까지도 놀라울 정도로 규칙적이다. 누군가는 이걸 ‘운이 좋았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일이 한 사람의 관찰력, 태도, 그리고 ‘들어줄 준비가 된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나르시시스트 양육자 아래 자란 나는 당시 보호자 없이 혼자 병원에 다녔다. 고등학생에게는 꽤나 버거운 일이었지만, 원장님은 내가 혼자 왔다는 사실을 오히려 존중해 주셨고, 신경도 많이 써주셨다. 진료실에서 눈을 피하지 않으셨고, 설명을 이해할 시간을 충분히 주셨고, 선택지를 제시해 주셨다. 그분은 단순히 치료만 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를 환자로서 받아들이고 보호해 줬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다. 그 경험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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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학에는 ‘MUS(Medically Unexplained Symptoms)’라는 개념이 있다. 한국어로는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증상들’이다. 이는 단순히 ‘진단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증상이 분명 존재하지만, 검사나 영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경우를 가리킨다. 환자 커뮤니티에서는 MUPS(Medically Unexplained Physical Symptoms)라는 용어로도 쓰인다. 신체화 장애, 만성 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 불명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 범주에 속한 환자들이 의료 시스템 안에서 종종 ‘애매한 존재’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진단이 없으니 치료도 없고, 설명이 안 되면 오히려 환자 탓이 된다. 너무 예민한 거라든지, 신경성 문제라든지 같은 말들이 그 예다.


의료진조차 그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의과대학 커리큘럼에서조차 이 개념은 여전히 모호하게 다뤄지고, 환자 중심 진료보다는 ‘정량화된 병’ 중심의 구조가 굳어져 있다. 그래서 의사들은 환자를 숫자로 판단하고, 그 숫자가 기준치 안에 있으면 “이상 없음”이라 말한다. 그 구조 안에서 진짜 환자는 점점 사라진다.


MUS는 여전히 논쟁적이고, 그만큼 진료실 안에서 환자는 쉽게 침묵하게 된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진짜 이야기를 잃고 있다. 고통 속의 환자가 더 이상 자기 증상을 설명하려 하지 않을 때, 희망은 멈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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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조에서 ‘좋은 의료진’을 만난다는 건 말 그대로 유니콘을 만나는 일이다. 귀하고, 가능성이 낮고, 대부분의 사람은 보지 못한 채 이야기로만 듣고 산다.


그 할머니 원장님은 내게 ‘설명되지 않는 증상도 치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신 분이었다. 검사 결과에만 의존하지 않고, 환자의 말을 근거로 판단해 준 첫 번째 의사였다. 세월이 흐르며 거주지도 바뀌고, 다른 과 증상으로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그만큼 신뢰를 준 사람은 없었다.


많은 의사들이 검사 결과를 먼저 보고, 그 결과로 환자의 말을 해석하려 한다. 하지만 그 수치로 설명되지 않으면 증상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MUS 환자들에게는, 그런 태도가 가장 큰 상처로 남는다.


나는 이제 ‘기준치’라는 단어가 무섭다. 수치는 정상인데 왜 이렇게 아플까. 수치가 정상이란 이유만으로 내 고통은 설명되지 않은 채, 진료실에서 배제된다. 마치 “당신은 환자가 아닙니다”라는 암묵적 선언처럼 들린다. 실제로는 질문도 채 끝나기 전에 진료가 종료되고, 때로는 쫓겨나듯 문을 나서야 한다.


진료실 문을 나서면, 대기실의 다른 환자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웃으며 다음 예약을 잡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나만 이 시스템 안에서 ‘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 괴리감은 통증보다 더 깊이 나를 아프게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유니콘을 떠올린다. 내가 보호받을 수 있었던 단 한 사람. 단 한 명의 의료진이 ‘환자는 수치가 아니라 존재’임을 보여준 그 시간. 그 기억 하나가 내게 아직 남아 있는 신뢰의 근거다.


지금도 나는 다시 그런 의사를 만나길 바라며 병원을 향한다. 언젠가 또 다른 유니콘을 만날 수 있기를, 수치가 아닌 사람으로 나를 봐줄 누군가를 다시 마주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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