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가 '정상'일까, 자기 의심
질환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일상의 요구는 나를 다시 ‘정상인’처럼 살도록 내몰았다. 현실은 변하지 않았고, 세상은 여전히 ‘정상적인 나’를 기대했다. 나는 그 기대와 몸의 한계 사이에서 매일 흔들렸다.
내가 진짜 아픈 게 맞는지, 이 정도면 괜찮은 건지 매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몸은 분명히 신호를 보내지만, 겉보기에 멀쩡하다는 이유로 그 신호는 쉽게 무시된다. 무리하면서도 일상을 유지하고, 아픈 걸 감추며 ‘정상’처럼 살아간다. 그 경계 어딘가에서 나는 나만의 균형을 찾으려 애쓴다.
생물학적으로 살아는 있다.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채로 일상은 이어지고,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럽다. 나는 정말 아픈 걸까? 아니면 그냥 피곤한 걸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병원에서조차 정상 수치라는 말을 들으면, 그 순간부터 내 고통은 ‘애매한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애매한 존재로 살아가는 날들이 길어진다.
이 글은 나의 생존 전략 중 하나인 ‘정상처럼 보이되, 무너지지 않는 법’을 기록한 것이다.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조정과 포기, 그리고 감내의 기술들. 그것이 때로는 더 큰 고립이 되었지만, 동시에 나를 살아 있게 해 준 유일한 방법이었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인다는 건, 때로는 가장 잔인한 위로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야”라는 말은 고마우면서도 낙담하게 만든다. 그 말은 내 고통을 지워버리고, 내가 얼마나 애써서 그 자리에 서 있는지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단지 내가 얼마나 참고 버티고 있는지의 결과물일 뿐이다.
스스로도 헷갈릴 때가 많다. 이런 정도의 통증이나 피로는 누구나 겪는 거 아닐까, 내가 유난을 떠는 건 아닐까. 그렇게 자기 감각을 의심하다 보면, 몸이 보내는 신호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다. 겉보기에 멀쩡한 나와 실제로 아픈 나 사이의 간극 속에서, 감정의 균형이 무너진다.
아픈 몸을 안고 일상을 살아가는 건 일종의 줄타기다. 일도 해야 하고, 관계도 유지해야 하고, 사회적 역할도 놓을 수 없다. 하지만 내 몸은 예측할 수 없는 패턴으로 움직인다. 무리한 하루를 보내면 당연히 그다음 날은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어렵다. 머릿속은 뿌옇고, 손끝이 저리고, 모든 관절이 시큰거린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증상이 악화되기도 한다. 몸이 나만의 타이밍으로 움직이는 듯해 혼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다.
쉬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는 일은 쉽지 않다. 주변의 기대, 내가 감당해야 하는 역할, 그리고 내가 멈추는 순간 생기는 빈자리.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시 일상으로 밀어 넣는다. 쉬는 대신 참고 움직이기로 마음을 바꾸는 순간, 몸은 조용히 저항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더 악화된 몸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일상의 ‘정상성’을 연기하게 된다. 아픈 걸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며,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틴다. 그렇게 하루를 넘기다 보면 진짜로 내가 아프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진다. 아픈 게 일상이 되어버려 그 감각에 익숙해진다. ‘어느 정도 아픈 건 늘 그렇지’ 하는 체념이 몸과 마음에 배어든다.
2023년 10월, 몸의 이상 신호를 처음으로 확실히 인지했다. 열이 나는데 춥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 더웠다. 집안 온도를 24도로 유지하자 남편은 옷을 더 껴입었다. ‘이러다 말겠지’ 하며 물과 전해질 음료만 챙겨 마셨다. 이미 많은 걸 내려놓고, 최대한 몸에 부담이 적은 일을 선택했지만, 몸은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었다.
쉬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는 동안 열은 점점 심해졌고, 11월엔 시부 상이 겹쳤다. 부산까지 다녀오는 일은 증상을 더욱 악화시켰고, 결국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진료실에서 의사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이랬다.
“두 달이나 열이 나는데 한 번도 병원에 안 왔어요?”
그 순간, 가슴 한가운데 휑한 구멍이 난 것 같았다. ‘아, 열이 나면 병원에 가야 하는 거였구나.’ 너무 당연한 사실이 내겐 멀게 느껴졌다. ‘정상처럼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내 몸의 경고를 듣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 후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골반과 다리 통증은 점점 심해졌고, 외출을 자제하게 되었다. 쉬면 나아질 거라 믿었지만, 통증은 전혀 줄지 않았다. 악화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흐름이었다.
몸이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습관과 인내의 방식이 결국 나를 더 다치게 했다. 일상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상처럼 보이는 나’와 ‘실제로 아픈 나’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는 일.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첫 번째 회복의 태도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를 겉모습으로 판단한다. 말을 또박또박 하고, 인사를 하고, 일을 해내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픈 몸을 안고도 일상을 유지한다. 정상처럼 보이기 위해, 정상의 껍질을 쓴 채 하루를 버틴다.
그들의 아픔은 소리도, 형태도 없기에 더 쉽게 놓친다. 몸이 보내는 신호는 소리 내지 않기에, 잡지 않으면 금세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건 신호가 아니라 아픔의 감각이다. 신호는 계속되고, 무시된 채 쌓이다 결국 폭발한다.
나도 그들 중 하나다. 진료실에 앉아 있는 몇 분은 괜찮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병원을 나와 주차장까지 걷는 동안 어지럼증이 몰려오고, 허리와 골반, 다리에 통증이 번진다. 안방에서 부엌까지, 집에서 차까지는 걸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에도 나는 매번 숨을 고른다.
증상을 기록하고 진료의뢰서를 준비해 간 지난 진료에서도 수확은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남이 나를 이해해 주길 기다리기보다, 내가 나를 이해하려 한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 그 어딘가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내가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것. 지금은 그게, 내가 또 다른 하루를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