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의료 시스템의 사각지대

진단명이 없으면 치료도 없다

by Mia 이미아

현대 의료 시스템은 병명과 수치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치료가 시작된다. 검사 수치가 '기준치'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으면 의사는 진단을 내리지 못하고, 환자는 치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만성 피로, 소화 장애, 온몸의 통증 같은 증상들은 검사 결과로 설명되지 않으면 '신경성' 혹은 '스트레스성'이라는 말로 정리된다. 병명이 없으면 아프다는 사실조차 의료 체계 안에서 존재하지 않게 된다.


병원은 본래 아픈 사람들이 찾는 곳이지만, 진단이 없다는 이유로 오히려 문턱 밖으로 밀려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반복된다. 의사의 “큰 병은 아니니 다행입니다”라는 말은 환자에게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의료 체계는 객관적 수치로 증명되지 않는 고통을 기록하지 못하고, 그 사이에서 환자는 제도 밖으로 흘러나간다.




병원에 가면 언제나 같은 말로 끝난다. “큰 이상은 없습니다.” “정상 범위입니다.” 의사의 말은 통계와 기준에 근거하지만, 그 말이 던지는 무게는 환자에게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환자가 병원에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진단명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고통을 이해받고 완화의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기대는 언제나 같은 문장 앞에서 무너진다. 측정되지 않는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 고통이 되고, 증명되지 않는 아픔은 진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환자는 점점 더 침묵하게 된다. “정상입니다”라는 말에 맞서 설명을 덧붙이는 일은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괜히 예민한 사람으로 보일까 입을 다물게 된다. 병원 문을 나설 때 남는 건 안도감이 아니라 더 깊은 고립감이다.



병명 없는 사람들의 현실


병명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관리’를 권유받는다. 운동을 해보라, 식단을 바꿔보라, 스트레스를 줄여보라는 말. 모두 옳은 말이지만, 그 말들이 반복될수록 환자는 의료 체계가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결국 사람들은 제도 밖에서 스스로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영양제를 사 먹고, 민간요법을 시도하며, 인터넷 검색으로 병명을 추측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마음을 이용당하기 쉽다.


나는 극도로 예민한 몸 탓에 대부분의 약과 보조제에서 부작용을 경험했다. 현재 복용 중인 약은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전문의와 조율한 결과이며, 일반 성인 복용량의 절반 이하만 사용하고 있다. 병원 밖에서도 적당한 운동, 규칙적인 생활, 식단 관리 등 가능한 모든 시도를 해봤지만, ‘몸에 좋다’는 것이 반드시 나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또다시 새로운 시도를 하기엔 몸은 지쳐 있었고, 마음은 이미 의심으로 가득했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나’라는 개인만 남기는 싸움이 된다. 병원도, 주변도, 시스템도 해결해주지 않으니 결국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 ‘환자도 아니고, 건강한 사람도 아닌 존재’로서의 혼란이 일상에 스며든다. 불명열은 3년 차에 접어들었고, 병원 외의 외출을 하지 못한 지 2년이 넘었다.


의문_03.png


제도의 빈틈, 그리고 새로운 접근


진단명이 없다는 이유로 의료 시스템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은 결코 적지 않다. ‘이상 없다’는 말에 절망하고, ‘크게 걱정할 병은 아니다’라는 말에 외로워진다. 고통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현실. 이제는 진단명이 없어도 치료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진단이 어려운 희귀 질환이나 불명 증상을 가진 환자들에게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기능의학이나 통합의학 같은 분야는 병명보다는 환자의 전반적 상태와 생활 맥락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기능의학 센터에서는 만성 질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전인적 진료를 통해 피로, 통증, 소화 장애 등 삶의 질이 유의미하게 개선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기능의학과 다학제 협진의 가능성


기능의학은 병명 중심이 아니라 환자 개개인의 생활습관, 영양 상태, 면역 및 대사 균형 등을 종합적으로 점검하여 치료 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에도 맞춤형 대응이 가능하다. 다학제 협진 역시 중요한 대안이다. 여러 과 전문의들이 함께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증상 완화를 위한 대증 치료와 필요한 경우 스테로이드나 면역조절제를 시험적으로 사용해 염증 반응을 줄이며, 통증 클리닉이나 정신건강의학과 연계를 통해 삶의 질을 관리한다.


이러한 접근은 병명을 모른다고 해서 환자를 외면하지 않는, 의료의 기본 원칙에 충실한 방식이다. 한국에서도 희귀 질환센터나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이러한 다학제 진료 모델이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협진_02.png


의료진 교육과 인식 전환


또 다른 방향으로, 환자 중심의 진료 철학을 의료진 교육에 포함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증상들을 현대의학에서는 흔히 MUS(Medically Unexplained Symptoms,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증상)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환자들을 정신과적 문제로 단순 치부하거나 간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인식 전환이 중요하다.


영국 국립의학회 보고에 따르면, 항우울제는 우울증이 없는 경우에도 만성 통증 등 설명되지 않는 신체 증상 완화에 효과를 보일 수 있으며, 적절한 복용 시 증상 경감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는 의료진이 환자의 신체와 정신 상태를 함께 살피며, 필요 시 통증 클리닉이나 정신건강의학과로 연계하는 등 포괄적인 치료 전략을 취해야 함을 시사한다.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증상들을 단순히 ‘스트레스’로 치부하지 않고, 환자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환자가 증명을 강요받지 않아도 치료받을 수 있는 시스템. 그것이 의료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구조일 것이다.

keyword
이전 03화환자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