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길을 찾기
아픈 몸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증상은 매일 달라지고, 어제 가능했던 일이 오늘은 불가능해진다. 그 변화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드물다. 결국 나는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던 나는 병원비 몇천 원을 마련하기 위해 부모님 눈치를 봐야 했다. (집에 돈이 없었던 게 아니라, 나르시시스트 양육자의 통제와 학대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다른 브런치북 『생존의 기억』에 자세히 담겨 있다.) 그 시절의 경험은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는 일 자체가 죄책감으로 연결되는 학습 경험이었다. 아프면 혼이 났고, 병원에 가면 “괜히 돈만 쓴다”는 말을 들었다. 아픔을 표현하는 건 곧 존재를 부정당하는 일이었다.
‘부모에게 부담이 되지 말자’는 생각은 곧 아픔을 참는 습관으로 굳어졌다. 형제들이 쉽게 얻던 것들을 나는 언제나 미뤄야 했다. 아픔은 스스로 삼켜야 하는 일이었고, 도움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참는 법’과 ‘견디는 법’만 익혀야 했다.
이런 경험은 ‘아프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무의식적 믿음으로 남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아픔을 숨기고 스스로 해결하려 했다. 병원비를 낼 때마다, 약을 살 때마다 어릴 적의 두려움과 미안함이 다시 고개를 든다. 아픔을 말할 권리를 스스로 허락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매일 아침 내 몸의 상태부터 살펴야 한다. 그날의 몸 상태를 점검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내려놓는다. 예전엔 계획을 지키지 못하면 게으르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선에서 살아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회복의 기술이다.
때로는 무력감이 싫어 무리할 때가 있다. 얼마 전에도 단순한 번역 일을 하다가 ‘내 몸에 지는 기분’이 들어 끝까지 버텼다. 그 대가로 며칠을 꼼짝 못 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알고도 그 경계를 넘어버린다. 다음 날엔 두통과 전신 피로가 밀려오고, 조금만 움직여도 식은땀이 흐른다. 잠깐 깼다가 다시 기절하듯 잠드는 일이 반복된다. 최근엔 신경계 증상까지 악화되었지만, 다행히 내일은 진료가 잡혀 있다.
아프다고 하면 돌아오는 조언은 늘 비슷하다. 운동해라, 건강식 먹어라, 햇볕 쬐어라. 모두 옳은 말이지만, 내게 필요한 건 그런 ‘일반론’이 아니라 내 몸에 맞는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처음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았을 때, 의사는 매일 햇볕을 쬐라고 권유 했다. 나는 매일 10분씩 산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자 몸이 급격히 무너졌고, 몇 달을 침대에 누워 지냈다. 그 경험은 ‘노력하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무엇을 먹으면 덜 아픈지, 얼마나 움직여야 다음 날 덜 힘든지, 매일 몸으로 실험하며 배웠다. 이 과정에서 실패는 늘 따라왔다. 시도하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반복. 좌절감 속에서도 매일 바뀌는 조건들을 겪으며 조금씩 배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나만의 감각으로 쌓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다.
아프면 혼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아직도 남아 있다. 병원에 가도 결과가 없으면 “괜히 돈만 버렸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래서 ‘참으면 나아질 거야’라는 생각이 습관이 됐다. 하지만 아무리 참아도 나아지지 않았고, 지금의 나는 하루 대부분을 침대에서 보낸다. 이 글도 침대에서 쓰고 있다.
외로움은 여전하지만, 그 속에서 내 몸의 속도를 배우는 일을 시작했다. 무리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몸이 보내는 신호를 따라간다. 어쩌면 이것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아픔과 함께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기술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목표가 바뀌었다. 남들처럼 완전히 건강해지겠다는 희망보다,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하루를 만드는 일로 초점이 옮겨졌다. 컨디션에 따라 하루를 조율하고, 무너지면 감각을 바로잡는다. 좌절감이 밀려와도 완전히 주저앉지 않기 위한 작은 연습들을 반복한다. 그렇게 하루가 쌓여 간다.
어쩌면 ‘잘 산다’는 건 내 몸의 조건 안에서 삶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오늘의 한계 안에서, 내일은 내일의 여유 속에서.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현실적인 의미의 ‘살아남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