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벌신사가 되어버린 여인을 아시오
나는 옷을 잘 안 산다. 이렇게만 말하면 어느 정도인지 감을 못 잡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다. 우선 난 30대 여인인데 1년에... 세 벌...? 정도 사는 것 같다. 이 문장을 적고 혹시 몰라 옷장을 확인해 보니 역시 맞다. 내 돈 주고는 옷을 두 벌 밖에 안 샀다. 여름에 무신사 특가 떴다고 동생이 알려줘서 산 롱패딩이랑, 유니클로 챠콜색 와이셔츠. 롱패딩은 심지어 내가 여태 롱패딩이 하나도 없어서 제발 주변에서 사라고~ 사라고~ 애원하길래 역시즌으로 하나 장만했다. 이제 저 롱패딩은 구멍 나서 솜털이 밖으로 송송 나올 때까지 나와 함께 하는 거다. 오죽하면 엄마가 1년에 한 번 정도 꼭 돈을 준다. 제발 옷 좀 사 입으라고. 아니면 생일 선물을 옷으로 받을 때도 많다. 단벌신사처럼 사는 나를 보다 못한 가족들이 내 옷을 가끔 사준다.
이렇게 난 지독하게 옷을 안 산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이십 대 초반~중반 까지는 그래도 꽤 옷을 자주 샀는데, 주로 부평 지하상가에서 저렴한 보세옷을 많이 샀다. 그땐 지금보다 마르기도 했고 대학생이라 한창 꾸미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한창 꾸미던 대학생 시기를 거쳐 취준생-직장인 루트를 밟으며 서서히 옷을 잘 안 사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러네이 엥겔른의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고 난 후, 예쁘게 꾸미는 시간과 돈이 아까워졌기 때문이다. 이 책은 워낙 유명한 책이라 대강 요약하자면 '여드름이 나든 옷이 낡든 외형은 거울을 안 보면 그만이다! 그 시간과 돈을 다른데 써라!'라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외형의 꽃단장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이 좀 아깝게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다 놓은 것은 아니지만, 예쁘다는 이유로 이미 옷이 많은데 계속 옷을 산다거나 섀도가 있는데 또 사는 행위는 거의 안 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쓴 책 후기 한 번 보시라요. 아래 링크에서 확인 가능.
https://blog.naver.com/fpdlsqhdnvj/221280213070
두 번째는 내 여윳돈의 우선순위가 점차 확고해졌기 때문이다. 난 타고나길 진성 오타쿠인데 월급에서 나오는 뻔한 여윳돈으로 덕질도 하면서 옷도 사재낄 수는 없었다. 덕질 말고도 전반적인 문화생활을 좋아해서 뮤지컬도 봐야 하고 전시도 보고 싶고 책도 읽어야 하는데 여기에 또 옷이나 화장품까지 이것저것 구매하기에는 내 월급이 너무 작고 소중했다. 한정된 재화 안에서 나를 가장 만족시키는 소비를 하려면 내 소비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난 옷과 화장품보단 덕질과 문화생활을 택했다. 처음부터 확 바뀐 건 아니고 점차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해나가다 보니 차츰 확고해져서 이렇게 옷을 죽어도 안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 번째 이유는 다들 어느 정도 공감할 터인데, 바로 부동산 문제다. 옷장 및 헹거 용량은 한정되어 있다. 기존옷을 버리지 않고 계속 사면 옷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공간이 없어!! 예쁜 옷을 새로 사도 그 녀석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그러면 이제 기존에 있던 옷을 버리고 공간을 확보한 후 옷을 사야 하는데 나는 도저히 멀쩡한 옷들을 그저 자리 확보를 위해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납득하기 힘들었다. 요즘 공산품 질이 너무 좋아서 아무 옷이나 사도 엄청 튼튼한데 어느 순간부터 SPA 브랜드 옷을 샀더니 얼래? 더 튼튼하다. 막 빨아도 절대 안 망가지는데 이 짱짱한 옷을 그저 옷장 공간 확보를 위해 버려야 한다니...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유들이 겹쳐서 극도의 단벌신사가 되었다는 이야기. 주변 사람들은 혀를 쯧쯧 찬다. 젊고 예쁜 나이인데 그렇게 꾸미는걸 안 좋아해서 어떡하냐고. 하지만 말은 정확하게 하고 싶다. 난 꾸미는 걸 안 좋아하는 게 아니다. 무한정의 자본과 부동산이 내게 있었으면 엄청한 맥시멀리스트가 되었을 것... 하지만 없으니까... 인생은 선택과 집중. 하여 난 앞으로도 단벌신사로 살겠다! 하지만 엄마가 너무 속상해하니 앞으로 조금씩은 더 옷 쇼핑을 해보는 걸로 글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