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한식문화 공모전 / 브런치 X 우리가 한식
매주 곰솥에 끓이고 계시는 것이 무엇일지 가늠이나 되는가. 대체적으로 곰솥에 끓이는 음식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몇 시간이고 불 앞에서 땀을 뻘벌 흘리며 끓이는 흔히 보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곰탕이다
마누라가 여행을 떠날 때나 나오는 그런 사골탕을 생각하겠지.
우리 집 곰솥에서 나오는 음식은 그런 국이 아니라, 오로지 첫째 손녀가 그리도 좋아하는 돼지등뼈 김치찜이다. 매번 김장철이면 빠지지 않고 빨간 양념이 묻힌 푹 삭은 묵은지 들어간 등뼈찜.
맛은 항상 보장돼있다. n년간 먹어온 외할머니의 보장된 묵은지가 들어간 돼지고기를! 누가 맛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거기다 뼈에 붙은 고기라면 결단코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스무 살 중반이 된 지금도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샐러드바가 있는 음식점에 가면 폭립을 지나칠 수 없는 인간이 되었으니.
할머니는 고기를 긴 시간 동안 푹 익히시지는 않았다. 뼈에 붙은 고기가 갈비찜이나 갈비탕처럼 뚝뚝 떨어지면 고기 먹는 맛이 없다시면서, 그저 등뼈를 밑에 깔고 묵은지를 올리시고 물을 붓고 딱 고기가 익을 만큼만 끓여내시곤 했다.
이런 신념으로 만들이진 등뼈찜은 맛있다. 쫄깃쫄깃한 고기며, 적당히 익은 묵은지에는 밥을 두 그릇을 먹어야 나의 식사는 끝이 났다. 입이 짧은 동생과는 달리 나는 식성이 좋은 초등학생이었으므로, 이놈의 등뼈찜만 끓여주시면 주말의 꿀 같은 늦잠은 고사하고 일요일 아침에 하는 동물농장도 거부하며 긴팔은 입고 있든 반팔을 입고 있던 팔을 붙이며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있었으니 말이다.
무슨 요리를 만들어내던 간 힘들지 않은 과정은 없지만, 이놈의 등뼈찜을 맛보기 위해서는 많은 여정이 따랐다. 격주로 놀토가 있던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은 아침 일찍 출근한 엄마는 생각도 안 하고 토요일 아침마다 돼지고기를 사러 나가자는 외할머니의 부름에 따라 엄청난 여정을 떠나는 마법사처럼 그 여름에 선캡을 쓰고 킥보드를 챙겨 따라나서곤 했다. 무려 도보로 40분이나 걸리는 공판장을 30도가 넘는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외할머니의 발걸음에 맞춰 따라다녔다.
나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판장에 가면 외할머니의 매의 눈을 피할 수 없는 많은 돼지들의 뼈가 기다리고 있다. 인내심 없는 초등학생 두 명은 등뼈찜을 위해 요리사의 원픽을 기다려야 한다. 등뼈는 살이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아야 하며, 색이 너무 붉지도 연하지도 않아야 한다. 아아- 드디어 외할머니의 넘버원 등뼈가 결정이 나면, 재빠른 결제를 끝내며 파란봉다리에 들어있는 그 엄청나게 무거운 등뼈를 담기 위해 준비해온 바구니_구루마 혹은 짐수레_에 넣고 질질 끌며 가야 한다. 책임감 넘치는 첫째 손녀였던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한 손엔 킥보드를 한 손엔 바구니를 끌며 집에 도착해야 드디어 첫 번째 여정의 끝이다.
아_어째서 나의 여정은 끝이 나지 않는가. 어릴 적 기억이라 외할머니께서 등뼈를 미리 삶으셨는지는 확실치 않겠지만, 고기에서 비린내가 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아마 초딩 두 명이 잠든 그 밤에 할머니는 등뼈를 부드럽게 할 만큼 인고의 시간과 함께 더운 여름밤에 불 앞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셨을 것이다.
그 인고의 밤이 지나면 일요일 아침 일요일의 낙이던 아침프로를 제치고 졸린 눈의 눈곱을 떼내며, 세수하라는 잔소리를 듣고 화장실에 다녀와야만 먹을 수 있는 묵은지 등뼈찜이 드디어 완성이 되는 것이랬다.
드디어 일요일 아침, 다섯 식구가 식탁에 앉아 여전히 다른 식구들 것만 먼저 떠서 담아주신 등뼈와 김치를 바라보며 외할아버지가 어서어서 숟가락을 들기만을 기다렸다.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드시면 부리나케 옷을 걷어올리고, 너무 뜨거워 김이 솔솔 올라오는 등뼈 하나를 겁도 없이 집었다가 뜨거움에 놀라 엄지와 검지를 한 번 빨았다가 소심하게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먼저 털어 넣었다. 한 김이 식으면 다시 비장하게 등뼈를 들어 올린다.
어른들 말씀은 틀린 게 없어! 역시나 슬기로우신 외할머니의 말 마따라 고기는 너무 푹 익히지 않아 적당히 씹는 맛도 있고 힘줄이 살아있어, 탱글탱글한 맛을 자아낸다. 어쩜 그리 맛있을 수 있을까. 금세 한 그릇을 끝내고 나는 두 번째 그릇을 들이민다. 그러면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우리 예쁜 손녀 잘도 먹네 오구구' 하며 또다시 한가득 리필되는 밥 한 그릇과 김치찜 한 그릇. 이미 식사를 끝낸 세 식구는 자리를 뜨고, 고기는 따로 뜨지 않고 묵은지만 절반가량 들어있는 할머니의 그릇을 보며 그 시절엔 외할머니가 고기를 안 좋아하시는구나 하는 그런 철없는 어린이였다.
자라고 난 다음에야 안 사실이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었던 우리 집의 사정에 따라 파란 봉다리 한가득 들어있던 등뼈는 그저 삼겹살이나 목살보다는 가격이 저렴한 상품이었다. 삼겹살이나 목살을 한 근을 살 돈이면 훨씬 많은 양의 등뼈를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손이 무지하게 크셨던 할머니의 묵은지를 처리할 요량으로도 알맞은 음식이 아니었을 수 없다
그 많은 묵은지를 처리해야 돌아오는 겨울에 김치를 또 가득 담그셔야 했었으니 말이다. 한번 끓여내면 족히 삼 사일을 먹을 수 있는 양에도 불구하고 호불호가 덜 갈리는 요리이기도 하고, 다 먹은 등뼈들을 가차 없이 찬물에 빡빡 씻겨진후, 같은 곰솥에 또다시 부글부글 끓이셨다.
그렇게 곰솥은 제 임무를 맡아 등뼈 사골국도 만들어낸다. 이렇게 경제적인 음식이라니!
한 달에 쓸 수 있는 생활비는 정해져 있고, 한참 자라나는 초등생에 다섯 식구 입을 책임지려면 알뜰한 방법을 찾아내실 수밖에 없었던 외할머니는 등뼈찜을 자주 해주셨다. 그래서 지금도 좋아하는 음식을 꼽으라면 이 음식을 손에 꼽으며 생각하겠지만, 언제나 건강할 줄 아셨던 할머니가 아프신 이후로는 어느 순간부터 식탁에는 자주 올라오지 못하는 음식이 되긴 했다. 물론, 지금은 다시 건강해지셨지만 그 고생스러운 여정을 해가며 해달라고는 말할 수 없는 어른 아닌 재미없는 어른이 돼버렸다.
누구나 억척스러운 사연은 있기 마련인 것처럼, 그 시절 외할머니도 남들에게 말 못 할 만큼 힘든 시절이 있었더랬다.
젊은 시절 그저 남편만 믿고 있었던 결혼생활은 엄마를 임신했을 적엔 아무도 모르는 서울 어딘가 쪽방에서 먹을 것이 없어 맹물로만 버티는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고향에 내려와 살 때는 나름 행복한 시절을 지나 다 자란 삼 남매 중 첫째였던 우리 엄마를 시집보내고 이제 그러려니 나의 여생을 살아갈 까 생각하셨을 것이다.
어린 두 손녀를 데리고 온 엄마를 보며, 늘 아픈 시절에도 '너희는 나의 아픈 손가락'이라고 요즈음에도 여지없이 식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수다타임에 말을 꺼내시니 말이다. 엄마로서 외할머니로서 살아오신 시절이 너무 길어 어쩌면 외할머니 본인도 좋아하는 것을 잊고 사셨는지 모른다.
다 자라 어른이 되어 내 앞길 정도는 알아서 하는 사람이 됐을 때 오랜만에 가족모임으로 외식을 한 적이 있다. 새로운 곳을 가보고 싶어 가족들과 함께 감바스를 파는 식당에 간 적이 있다. 생전 처음 드신 감바스를 모임에 나갈 때마다 자랑할 거라고 하셨다. 가족들이 사 오는 회나, 고기를 드실 때도 너무 맛있다고, 고기를 참 좋아하신다.
이렇게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시는 분인데, 나는 그냥 등뼈를 잘 안 드시는 외할머니를 보고 '고기를 안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판에 박고 살았을까.
아니면 등뼈를 사러 가는 그 여정이 즐거워 일요일 아침마다 맛있는 냄새가 나던 할머니의 부엌이 그리워 그러려니 하고 살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면 묵은지 등뼈찜이 올라오는 그 식탁에서마다 공부든 뭐든 잘하는 건 없어도 그저 예쁜 내 새끼 하시는 할머니의 칭찬에 뭐든 잘 먹는 손녀딸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에 이 긴 세월을 모른척하고 살았는가 보다.
여전히 선물을 사다 드리면 '이 비싼걸 돈도 없는데 뭘 샀어!' '얼마 안 하니까 그냥 쓰세요!' 하며 티키타카를 매번 하는 나의 사랑하는 외할머니.
이제 80을 훌쩍 넘어 안 아프신 곳보다 아픈 곳이 더 많으신 할머니는 어제도 게으른 손녀딸은 오늘 오라고 전화하셨던 것을 알면서 피곤해서 또 오후에 일어나 찾아뵈질 않았다. 글에서나마 죄책감과 죄송함을 느끼며 다음 주에는 함께 외식을 하러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