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은 기세야
퇴사 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 입시 준비를 했다. 일단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숨통이 좀 트였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내가 지원하고 싶은 과를 골랐다. 나는 문화예술을 사랑하지만 그걸 직접 하는 퍼포먼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작품/상품의 외재적/내재적 구조와 의미를 분석하고 기획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그걸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안목과 인식을 길러줄 수 있을만한 과를 먼저 고르고, 그다음 지원할 수 있을만한 수시 전형을 찾아서 총 3군데에 지원을 했다.
2011년까지만 해도 꽤 많은 대학에서 대안학교 특별전형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자기추천전형까지 찾아봐서 지원했다. 스스로 내가 대안학교 졸업자들 사이에 있으면 꽤 평범하고 무난해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각 과에 맞게 자소서를 작성하고, 관련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했다. 수시에도 학생부 성적기준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몰라서 좀 당황했었다. 다행히 3군데 모두 잘 지원했고, 1군데는 논술시험, 2군데는 면접까지 봤다. 그중 한 군데의 면접이 가장 인상 깊었다.
면접팀은 4인 1조로 구성되었다. 내가 면접 첫 팀이었다. 대기하는 친구들은 다 교복을 입고 왔는데, 나만 사복을 입고 와서 좀 놀랐다. 다른 대학교에 대안학교 특별전형으로 지원했을 때는 다들 사복을 입고 왔었는데, 여기는 자기추천전형으로 지원해서 그런지 분위기가 좀 달랐다.
면접장에 들어갔더니 하얗고 동글동글 찐만두 같이 푸근해 보이는 교수님과 TV 다큐의 자연인 같은 교수님 두 분이 앉아계셨다. 찐만두 교수님은 면접에 들어간 나 포함 4명에게 웃으며 초콜릿을 나눠주셨다. 나는 평소 초콜릿을 좋아해서 받자마자 뜯어서 먹기 시작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초콜릿을 받아 손에 들고만 있었다. 본능적으로 '아 이게 아닌가 보다' 싶어서 먹던 초콜릿을 다시 잘 싸서 손에 쥐었다.
면접할 때 내 전략은 딱 하나였다. 저 사람들은 어차피 내 자소서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질문이 들어오던 자소서에 썼던 내 경험과 장점을 엮어서 대답하자. 여기에 면접관과 나만 있는 것처럼 나한테 집중하게 하자. 면접시간 신경 쓰지 말자. 내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면접관이 알아서 끊으시겠지.
면접 질문은 주로 찐만두 교수님이 하셨다. 들어오기 전에 어떤 경험을 했는지, 뭐가 좋았는지... 그리고 당시 입시생들에게 미리 공개되어있던 예상 질문도 하셨던 거 같다. 나는 전략대로 무슨 질문이 들어오건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찾아 내 자소서 내용을 덧붙여 답을 했다. A 질문에 답하면서 A’를 덧붙여 말하니 바로 반응이 왔다. 정해져 있는 질문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덜 다듬어지고 러프한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찐만두 교수님은 특히 내가 어린 나이에 공정여행사에서 일했던 점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셨다. 입사 계기를 설명하면서 학교 다닐 때 만들었던 문화기획 행사와 외부 연극 참여 활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었다.
자연인 교수님은 내가 대안학교 출신이라는 것에 흥미를 보이셨다. 이야기를 듣고 곧장 압박면접을 시작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고 뉘앙스가 그랬다. 그때 나는 그걸 압박면접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이 분은 왜 자꾸 나한테 시비를 걸지...?'라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결국 질문 마지막 즈음에 대안학교를 나온 걸 만족하냐고 약간 삐딱한 어투로 묻자 욱해서 어금니를 꽉 물고 “네” 하고 대답했다. 대안학교 다니면서 들었던 ‘거긴 비행청소년들이나 가는 곳 아냐?’ 같은 말들이 생각나서 순간적으로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욱한 것을 감지한 찐만두 교수님이 바로 끼어들어 '이 친구는 잘 다녔을 것 같은데요~' 하면서 질문을 갈무리시키고 여행사 다녔던 것과 다른 것들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조금 분이 안 풀려서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긴 했는데 그래도 면접은 잘 본 것 같았다. 15분 정도로 예정되어있는 면접이 내 얘기 때문에 약 1시간 동안 진행됐고, 그중에서도 나 혼자 30분 넘게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끝나고 나와서는 긴장이 풀려서 먹었던 초콜릿을 다 토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는데 자연인 교수님에게 욱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찜찜한 마음을 갖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결과는 합격이었고, 더 나아가 수시장학금까지 받고 입학하게 되었다. 나중에 들으니 두 분 다 나를 좋게 보셔서 면접 점수 만점을 줬다고 했다. 찐만두 교수님은 알고 보니 우리 과 학과장 교수님이셨고, 면접 당시 고개를 약간 기울인 내 삐딱한 모습이 맘에 드셨다고 했다(난 내 자세가 반듯한 줄 알았는데ㅠㅠ). 다른 교수님은 퇴임하셨나, 다른 과 교수님이었나 그래서 입학하고 다시 볼 수는 없었다.
돌이켜보면 내 면접 태도가 모든 학교에서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면접장에서 욱하는 거나, 초콜릿을 준다고 뜯어서 먹고 있다거나, 교복을 안 입고 사복을 입고 온 것부터 감점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다만 내 면접을 보았던 교수님들은 나의 그런 부분들을 '장점에 비해 사소한 것' 혹은 '좋은 자질'로 바라보는 어른들이었기 때문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말 운이 좋았다.
찐만두 교수님은 입학 후 내 인생 몇 안 되는 은사님이 되신다. 나는 이후에 종종 엄마에게 이 교수님을 만나는 것에 내 인생의 행운을 다 쓴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