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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본 vs. 미니 스마트 패드

균열 없이 새로운 것을 들이는 법

by 가브리엘의오보에
책이라면 문고본, 스마트 패드라면 미니?


‘매체를 넘는 생각’의 새로운 글을 쓰려고 아이디어를 구상하던 중 생각한 내용이다.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영화 Perfect Days.

그 남자, 규칙적으로 살아간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음악을 틀고,

같은 음료를 사 마시고,

변기를 닦고, 햇빛을 보며 앉는다.

철저히 자기 세계 안에 들어가 살고 있다.

알렉산더에게 햇볕을 가리지 말라고 한 그처럼.


그는 멀어져 있다.

세상, 가족, 기대, 요구, 강요되는 삶의 방식에서


나는 그에게 이입됐다, 영화를 보는 내내.

동생과 조카가 떠난 후 그의 눈물을 이렇게 해석했을 정도로.


‘내가 세운 나의 성을 겨우 지켜냈어!’


조카가 머물면서 흔들린 내 세계.

차에 기름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애청하던 음악 마그네틱 테이프를 팔던 날.

조카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걷는 그의 숨죽임.

그의 세계가 침범되고 균열이 갔다.


나도 저런 생활 리듬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파도, 사람들의 변화, 나의 변화, 그리고 나락.

사람을 멀리하며 나를 꽁꽁 싸매고 보호하는 시간들.


그렇게 지속 가능하도록 유지하던 내 세계에 변화가 생겼다.

어느 OTT의 구형 기기 지원 중단. 6월 초다. 곧 다가온다.

대체제는 있다. 하지만, 내 순서, 리듬, 호흡에 변화가 생긴다.

화면은 작아질 것이고, 누워서 보려면 지지대로 추가로 필요하다.


그래서, 스마트 패드를 하나 구입할까 생각했다.

그때, 그가 떠올랐다.


그는 고서점에 비정기적으로 간다.

아니, 한 권을 다 읽으면 새로이 책을 고르기 위해 고서점에 간다.

그는 눕든 앉든 가볍게 들 수 있는 문고본을 애용한다.

아마도, 문고본은 형식이지 본질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 이후 재 출간된 소설 ‘나무’ 역시 그의 선택을 받았으니.

제대로 읽진 않았지만, 읽는다면 그의 마음을 한 겹 열고 들여다볼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지속하던 내용을 담을 그릇으로 미니 패드를 떠올렸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오직 나만의 리듬을 지속할 새로운 도구.

그것을 문고본 같이 작은 패드이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누군가에겐 문고본이고,

누군가에겐 광 디스크가 아니라 마그네틱 테이프이며,

누군가에겐 미니 스마트 패드일 수 있다.


그것이 나의 세계에 균열이나 변질을 가하지 않고 조용히 들어와,

내가 앉아서나 누워서나 눈을 떼지 않을 수 있는,

‘읽는’ 도구일 것이다.


나는 지금,

그런 작은 기기를,

나의 문고본을 고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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