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드는 것'이란,
식사,
에세이라는 이야기,
간식 혹은 식사가 될 빵,
음료 혹은 차가 될 커피 혹은 차,
가끔 가구.
항상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만드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는 걸까?
구성요소가 하나 둘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갈 때, 아니면, 아이디어가 하나씩 실체를 드러낼 때?
아닌 것 같다.
대부분 잘 안 되어 땀을 흘리니까.
혹시 완성의 달성감이 희열을 주나?
완성한 순간의 만족감, 성취감, 달성감. 과정의 어려움이 가끔 발길을 막지만, 고민하고 고민해서 그 난관을 넘는다.
이렇게 의지를 발휘하지만, 완성된 후 획득되는 달성감이 목표는 아니다.
나에게 달성감, 획득감은 목표가 될 감정이 아니다.
내가 만드는 것의 품질로 달성감, 획득감을 느낀다면 스스로 우울해질 것이다.
무언가 이루는 사람들은 과연,
계획과, 의지와, 달성감에의 도달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투자할까?
달성 후 얻을 가치가 추진력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기적 인간의 이익 지향적 태도일까?
난 그런 면이 없다는 걸까?
획득 가치는 달성감, 획득감, 그리고 이익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완성 후 얻는 가치는 달콤한, 누군가 숨겨 놓은 꿀이다.
잘 눈에 띄지 않고, 많지 않아 더 달콤한 꿀.
그래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충전한 이들이 모두 이 꿀에 붕붕거리며 달려드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난 꿀을 원하지 않는, 희한한(weird) 존재(thing)다.
그들과 다른 인간.
특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벗어나 있는' 인간.
그렇다면, 지금까지, 왜, 난 무엇인가를 만들까?
자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니라고 이야기했던 달성감 때문인가?
만든 후의 내 태도를 보자.
만들고 난 후 계속 사용하는 경우,
만들고 난 후 방치하는 경우.
필요가 있다면, 계속 사용한다.
만드는 동안, 필요가 줄어든다면, 만들고 난 후 방치한다.
결국, 필요가 내가 '만듦'이라는 행동을 하게 하는 계기인가?
◘ 식사: '내가 조리한 음식이 맛있어!'라는 자각과, 가족들의 호평 획득이 목표는 아니지만, 들으면 기분이 좋고 다시 시도할 생각이 든다. 또한 다른 메뉴를 시도할 마음도 든다.
◘ 이야기: '좋아요'의 숫자, 조회수의 숫자가 전작에 비해 높아졌을 때, 기분이 좋고 추진력이 생긴다. 그 숫자들을 목표로 정하진 않지만, 기분 좋음이란 달콤함에 취한 건 사실이다.
◘ 빵: 현재 가진 생각은, 집안에 있는 도구(에어 프라이어)로 제대로 된 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뿐. 이 생각이 구현되지 않은 현 상태가 추진력이 된다. 다양한 자료를 보고 따라 하고 결과를 감지한다. 가족들의 평도 한몫을 한다. 때론 시도를 잊고 살기도 하고, 때로는 제대로 재료를 준비하자는 의욕이 끓어오른다.
◘ 커피 혹은 차: 매일 마시는 커피 혹은 차를 맛있게 내리고 싶다. 가능하면 카페를 차리고 싶다.
◘ 가구: 솔직한 마음은, 조립 서비스에 맡기고 싶다. 조립 완구 역시 아저씨에게 맡겨 받았다.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는 범주에 들지 않는 카테고리다. 하지만, 요즘은, 그 마음을 뚫고 흘린 땀이 즐거워지긴 한다.
대상에 따라 과정을 즐기기도 하고, 획득 가치에 즐거워하기도 한다.
계획을 세우고 목표 의식을 불태우는 행동은 않지만, 나 역시 '보통 사람'이었나? 난 특이한 사람은 아니었던 건가?
누구나 성공을 달게 느낀다라고 전제한다면, 나도 다른 이들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다르다고 여겨왔다.
아마도 그것은 내 삶의 태도와 깊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생각난 것을 메모하고, '만들 수 있다'라고 판단하면 착수한다.
때론, 일상에서 만난 어떤 장면, 상황, 콘텐츠 등이 실마리가 되어 구상하고 메모한다.
그러다가, 그 손을 놓지 않고 집중해 나가면 어느새 나는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다.
내가 무엇을 만들기 시작하는 순간은 '가능하겠다'라는 판단이 섰을 때다.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는 방식이 아니어서, 나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not special, but weird)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낳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변화해야 할까?
더 나은 결과를 낳는다면, 나는 다른 사람과 비슷한 사람일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이 커뮤증의(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내가.
더 넓게, 더 깊게 알아야 할 것이다,
'가능하겠다'라는 판단의 적중률을 높이려면.
검증되고 실험된 결과를 중심으로 '앎'을 넓히고 깊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 열의를 가진다면,
그때부터 내 손에서 나온 '만든 것'은 많은 사람이 좋아하게 될 것이다.
상상의 힘을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상상의 내용을 실현함에 품질 감각을 더하겠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