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경험에 확신이 있니?
네가 겪은 바는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하니?
그렇다면, 타인의 경험은 어떠니?
상대방에 대한 신뢰의 크기에 따라 경험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여부가 결정되니?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이야기에서 논할 경험의 범위에 관해 정해보자.
너의 의견을 먼저 듣고 싶지만, 이 글의 특성상 내 정의부터 이야기해야겠다.
경험의 범위
나는 경험을 '지적인 경험'과 '체험'으로 나눈다.
- 지적인 경험: 이론에 관한 탐구, 학습, 강의 청취, 실험, 논쟁을 범위로 설정
- 체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몸으로 행하고, 오감으로 감각하며, 타인이나 상황의 변화를 겪은 바를 범위로 설정
어느 정도의 오차 범위, 일부의 누락은 감안한 정리다. 이제 경험에 대한 의심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경험에 대한 의심
지적인 경험과 체험을 통해 기억하고 있는 내용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하거나 생각한 적이 있니?
"지금 보고 있는 데도 믿을 수 없어!"
지난 번에 경험한 내용과 완전히 다른 상황이 벌어진 것일 것이다.
'내 기억이 정확한가?'
무언가 판단을 하려고 하는데, 예전 경험과는 다른 결과가 나오거나 다른 상황이 전개된 경우일 것이다.
'내 체험이 모든 상황을 대표할 상황이 될까?'
이 역시 판단을 함에 있어서, 내가 체험한 경험이 과연 이와 유사한 전체 상황을 대표해서, 내 경험대로 판단해도 될지 의심이 드는 순간이다.
“사실”이라고 믿는 경험도 언제든 흔들릴 수 있어. 감각은 상황에 따라 쉽게 왜곡되고,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지식에 의해 대체되니까.
생활권이라는 말
이야기를 더 전개하기 전에, 생활권이라는 단어를 먼저 언급하고 싶다.
생활권은 내가 경험을 얻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집, 회사, 학교, 대중교통, 휴가지, 모임, 취미, 시장 등 내가 일상을 보내는 모든 환경을 생활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내 경험의 범위와 생활권의 범위는 거의 동일하다고 생각해도 좋겠다.
이런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
이 말을 전제로, '생활권에서 통용되는 상식'이란 말을 만들 수 있다.
내가 일상을 보내는 모든 환경에서 통용되는 상식.
아마도 너는 이미 동일한 상식이 모든 상황이나 장소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득했을 것이다.
한 개인과 관련된 영역은 몇 가지로 나뉜다.
- 영향력의 원: 자신이 변경할 수 있는 범위
- 생활권: 자신이 변경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적이며, 타인의 영향력과 중첩되는 범위
- 사회: 자신이 변경할 수 있는 범위는 더욱 축소되고, 타인의 영향력과 뒤섞여 카오스 상태가 된 범위
각 영역마다 고유의 상식이 존재할 것이고, 공통된 상식도 존재할 것이다.
두 번째 화두, 경험한 내용은 '사실'이다.
내가 오감으로 감각하고, 체험한 모든 내용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사실'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이에게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될 수 있다.
이 경험의 차이가 논쟁을 만들고, 충돌을 야기하며, 혼란을 조장한다.
나에게는 사실인 경험이, 타인에게는 사실이 아니거나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통이 필요하다.
같은 대상이라도 사람마다 '사실'이 다른 이유는
그 사실이 발생한 상황이 다르고, 이해관계자도 다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타협이나 정리가 필요할 수 있다.
내가 한 경험에 대해 타인과 타협하거나 정리해서 이를 수정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의미는 아니다.
경험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다.
또한, 세상에는 영역별로 서로 다른 '사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에 따른다"라는 말, 알고 있니?
경험을 확신하는 방법
자신의 경험이라도 실험을 통해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경험의 확신은 ‘정답’이라기보단 당시의 기준점이야.
순간순간은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의심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거지.
그 의심이 생겨야 다음 경험과 비교할 수 있고, 사고의 폭도 넓어진다고 생각해.
타인 경험과 비교해 상황에 따라 '사실'이 '경험'이 어떻게 다른지 알 필요가 있다.
특히, 타인의 경험을 다루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이 영화는 실패작이었다”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걸작이었다”라고 말하니까.
첫째, 타인의 경험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에는 상황이라는 전제 혹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의 경험을 내 경험에 비춰 부정하기보다,
나에게 가치가 있을 것이라 판단되면 직접 확인하여 내 경험으로 만든다.
둘째, 타인과 경험을 나눌 때는 첫째 존중, 둘째 이해, 셋째 개인적 확인이 필요하다.
내가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해서, 자신의 경험을 맹신해서, 타인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 충돌을 야기하는 것과 같다.
타인의 경험을 경청하고, 상세히 묻고, 자신의 경험과 왜 차이가 나는지 파악한다.
타인이 겪은 상황을 동일하게 구성할 수는 없지만, 유사한 상황에서 내 경험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지 기회가 될 때 확인한다.
어떻게 보면, 너무 과한 접근이 아닌가 싶겠지만, 이런 노력을 조금씩, 단계적으로, 차분히 해야 할 이유가 있다.
경험이 명확할수록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영역이 다를 때 각 영역에서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하기 위해서다.
궁극적으로는 어울려 살기 위해서다.
인간을 혼자 살 수 있다.
화폐와 마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적 교류 없이 개인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 들어가서 살 수 있다.
타인과 접촉하게 될 때는 가능한 슬기롭게 대처하면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아빠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
인간은 혼자 살 수 있지만, 협업을 한다.
프리랜서도 여러 사람과 협업한다.
협업이 없이는 돈을 벌 수 없다.
따라서, 경험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올바른 기준 하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확신은 ‘잠정적인 것’이고, 의심은 그 확신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