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4
그럼 지난 이야기에 이어서 써본다
최종보스는 알고 보니 회장님
건축은 협업과 허가의 연속이다. 우리가 발견한 문제에 대해 현장 구성원들에게 동의를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이야기 해아할 한 명이 더 남아있었다. 그것은 회장님. 공사 중 꽤나 신경 쓰이고 중요한 부분들은 가장 높은 분의 허락까지 받아야 한다. 철없던 시절의 내가 맡은 프로젝트도 그랬다. 아무래도 이름 있는 건축가에게 위로했던 프로젝트이니 더 신경이 쓰일 만도 하다. 내가 그날 회장님을 만났더라면 살면서 가장 높으신 분을 처음으로 보는 날이었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가지 않고, 스틸라이프의 대표님만 가셨다. 어떻게 설득이 이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이야기는 잘 끝난 듯싶었다. 그럼 이제 복잡한 결정사항은 끝났고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일만 남았다. 빠듯한 시간 중 상당한 부분을 의사결정에 쏟아 버렸다. 그 말은 우리가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반복작업을 하지 않고 작업을 자동화하다
회장님에게 보고하고 최종 승인을 받을 때까지 우리도 손가락을 빨고 놀고 있지는 않았다. 승인을 받으면 바로 그 후 모델링을 진행할 수 있도록 대비했다. 나는 쪼렙이었기 때문에 기술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내 스승이자 사수는 달랐다. 그는 이미 설계 로직을 다 짜놓고, 그래스호퍼로 구현을 마친 상태였다. 나는 그의 등에 타고 프로젝트를 캐리 받는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홀로서기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나 혼자서 해당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왜냐면 그는 다른 프로젝트를 또 담당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 당시 기초가 없진 않았기 때문에 혼자서 일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결과물이 직접 건물이 되는 단계였다. 단 하나라도 틀린다면 어마어마한 공사비 손실의 주인공이 되는 그런 압박감을 견뎌야 했다. 그 규모는 돈으로 따지면 약 20억이었다. 내가 만든 전개도가 직접 공장에 들어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나를 향하고 있었다. 처음 일을 하는 사람에게 꽤나 가혹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해야 할 일이 이것이었는데.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내가 최대한 자동화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았으며 어떻게든 자동화를 해냈다. 사실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었다. 손으로 하는 작업으로는 도저히 작업성이 안 나왔고, 설령 한판을 만든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바뀌는 요구사항을 따라갈 속도도 안됐다. 그래서 스틸라이프 대표님의 요구사항을 최대한 이해하고 이를 반영할 수 있는 코드를 짜는 일을 했다. 아직도 그 시간들이 생생하다. 비용을 최소화하고 싶은 그의 요구사항과 실제 현장에서 바로 쓰일 수 있는 상세 수준의 전개도를 만드는 일. 그 작업을 위해 경기도 여러 공장들을 돌아다니며 샘플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속성으로 습득했다. 그때는 고통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크나큰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드디어 목업을 만들다
그런 고난한 과정 속에 3400장의 패널에 대해 자동으로 전개도를 만드는 스크립트를 완성했다. 속성으로 만들어낸 디테일과 전개도에 대해 나도 아리송한 부분들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저 클라이언트인 스틸라이프 대표님의 요구사항을 충실히 반영해 패널을 만들었다. 그래서 해당 디테일이 작동하는지 나도 잘 몰랐고, 대표님의 감만 믿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로가 불안할 땐 목업을 만들어보면 서로가 안심할 수 있다. 한 구간에 대해 목업을 만들었으며 정말 유리처럼 반짝이는 목업이 완성됐다. 내가 컴퓨터로 만든 결과가 실제로 지어지다니. 진귀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아직 문제가 다 해결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