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이야기 : 첫 일본 프로젝트

D+17

by 코드아키택트

일본에서도 날 아무 이유 없이 데려간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때가 일본 경제가 살아나는 신호탄이었을까. 그때 니케이를 들어갔어야 했나. 아무튼. 내가 있던 회사에 파사드 프로젝트가 많았다. 일본지사는 특정 제조회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회사의 임원이 파사드 프로젝트를 우리에게 모두 다 퍼다 날라주고 있었다. 사업적으로는 좋은 일이었고, 돌아보면 직원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많던 시기였다. 참으로 타이밍이란 게 중요하다.


첫 미팅은 하네다 공항 주변으로

내가 일을 시작한 시기는 꽤나 쌀쌀한 시기였다. 내 기억에 10월쯤 일을 시작했으니 그래도 가을이다. 인터넷도 뭔가 제대로 안되던 그 시기에 하네다 공항에서 몇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미팅이 있었다. 산지직송이란 말이 있듯이, 공항설계에 특화된 설계사무실이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Azusa Sekkei라는 곳으로 규모 면에선 다섯 손가락에 든다고 그랬다. 주로 인프라 관련된 설계를 잘하는 곳이라고 그랬다. 내가 처음 맡은 프로젝트는 인도 기차역 프로젝트였다. 일본에서 인도 기차역을? 그들도 해외사업에 열심히 뛰어들고 있었다.

프로젝트는 항상 서로가 뭘 원하는지 모르는 깜깜이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시켜 보다 보면 너네가 좀 잘하는 거 같으니 이것도 해줘 저것도 해줘. 이렇게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프로세스를 거치게 된다. 내가 맡은 내용은 원통모양의 기차역 플랫폼 천장 모델링이었다. 그것도 아주 상세하게. 꽤나 힘든 프로젝트였다. 내용은 계속 변했고, 합리적으로 코드를 구성하려 해도 안 되는 부분이 존재하는 프로젝트였다.


단면 프로파일 최적화 선행

각 디자인 의도별로 최적화를 진행하는 방식은 다르다. 어떤 프로젝트는 각각 패널에 대해 최적화를 진행시키는 반면 어떤 프로젝트는 단면 프로파일만 잘 정리해도 끝나는 경우도 있다. 여기는 후자에 속했다. 설계사 측에선 당당하게 그래스호퍼와 캥거루를 써서 최적화를 진행했다 했지만 실제론 상당히 스미마센 한 결과였다. 일본의 비즈니스 문화는 앞에서 칭찬하고 뒤에서 욕하는 그런 부분이 있다. 일본 대표는 앞에서 "나루호도(과연 그렇군요)"라며 칭찬의 말을 건넸고, 회사로 오는 길에선 "저 친구가 실력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 우리가 도와줘야 해"라며 이야기했다.

나는 갈라파고스라고 하는 유전알고리즘 도구를 통해 단면 프로파일 최적화를 진행했다. 이런 작업을 하면 부담되기도 한다. 결국, 책임이 온전히 나에게 넘어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담되긴 하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그만큼 큰 책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단면 프로파일을 최적화해서 패널 타입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패널 타입을 줄인다는 것은 그만큼 공사비를 줄인다는 뜻도 된다.


각종 모델링 수행 및 공사 전 이슈 확인

모델링을 높은 수준으로 하는 이유는 실제 공사 전 미리 문제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인부를 모아놓고 그때 가서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면 인건비는 인건비대로 나가게 된다. 반면에 모델링을 통해 미리 문제를 확인하게 되면 현장에서 재작업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공지식을 기반으로 모델링을 수행해 놓으면 경제적으로 상당히 유리하다.

내가 경험한 설계사들은 시공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편이었다. 밥 먹고 시공만 하는 업체에 비하면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설계사들이 헤매고 있을 때 제작사가 한마디만 해주면 참 좋은 일이다. 결국 그들은 그들만의 상세설계도가 있고, 그 내용을 통해 자신들의 디자인을 좀 더 구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델링한 것은 실리콘 코킹까지 모델링을 했다. 장인정신의 극한까지 가니 내 입도 그만큼 삐져나오던 프로젝트였다. 어쩌면 내가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더더욱 정신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요구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WBS, PBS, OBS

프로젝트는 진행될수록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다. 나는 멋도 모르지만 팀을 리드해야 했다. 내가 글에 시간을 뭉개놔서 그런데 약 6개월 정도는 지속된 프로젝트였다. 5개월 즈음엔 내가 부려야 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래서 그들을 가르쳐야 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효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지도 고민해야 했다.

건축은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자전거와 유사하다. 기초가 있으면 바닥이 있고, 바닥이 있으면 기둥을 세울 수 있고, 기둥을 세우면 보를 만들고, 보를 만들면 슬래브를 만들 수 있다. 이런 부분 하나하나로 나누는 방식을 PBS(Product Breakdown System)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WBS(Work Breakdown System), 그리고 누가 할지 정하는 게 OBS(Organization Breakdown System)이라고 한다. 말은 화려하지만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정하는 시스템이라고 보면 된다.

나는 각 건물 부재에 대해 담당을 정하고 각자의 모델링 중 합의 사항만 정하기로 했다. 가령 상세한 3D모델링을 손으로 하는 사람은, 특정 레이어에 힌트 정보를 넣어 나중에 조립 기반 모델링을 할 때 해당 부분을 키 값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부재를 자동으로 배치하는 부분을 담당한 친구에겐 정확한 포인트를 뽑으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천장 부분의 점검계단을 담당하기로 했다.

이렇게 나눠서 진행하면 효율적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서로 간 간섭되는 부분을 확인하거나 또는 우리에게 재량권이 있다면 말끔하게 처리하면 되는 부분이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그래도 처음치고는 서로 협업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일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될지 이해하는 팀원들과 또한 해당 프로세스를 좀 더 합리적으로 진행하고 싶어 하는 열망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대로 누군가를 컨트롤하는 일을 해보고 재밌는 일이었다. 비록 해당 프로젝트는 당선되진 않았지만 서로 협업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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