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들을 앞에 불러 놓고 큰 소리로 말했다.
“최선을 다해야지. 계획을 세웠으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 아냐”
아들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훌쩍거리며 울고 있다.
“할 거예요. 한다니까요……”
아들 우는 모습이 측은한 어미가 목청을 높인다.
“한다잖아요. 저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다 하잖아요!”
아비가 어미보다 조금 더 목청을 높여 말한다.
“고2나 되는 놈이 말이야.
남들은 자격증이 두 개, 세 개나 되는데 넌 하나도 없잖아.
어쩔 거야. 최선을 다한 다는 놈이 고작 이 정도냐”
최선을 두 번만 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선은‘가장 좋고 훌륭함, 온 정성과 힘’을 다하는 것이다.
난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최선을 다하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최선이라는 말만 들으면 왠지 부끄러웠다.
비난받는 느낌이 들었고 심지어 자괴감까지 들었다.
그런데 과연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면 얼마나 버틸까?
사람이 오죽 못났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야만 살 수 있을까.
인생이 과연 최선을 다하며 살려고 태어난 건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일까?
내가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나?
하루는 대학 다니는 어미의 큰 딸이 A학점을 받았다고 좋아한다.
“엄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미는 말한다.
“딸, 최선을 다하지 마.
인생 최선을 다하려고 태어난 건 아니야.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라.
그리고 나머지 그 시간에 하고 싶은 거 해"
어미는 그리 살지 못했다.
열심히 아주 열심히 노력하니 어느 정도 살 수 있었지만 남들과 비교하면 보편적 수준이다.
그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만 중년이 되어 남은 건 돌봐야 할 몸뚱이뿐이다.
아직도 도달하지 않은 먼 길만 남은 듯하다.
최선이란 단어는
내 의지를 불태워주기보다는 자괴감과 패배의식만 불어넣었다.
늘 내게 비교급 단어였고 결과물을 요구했던 그러니까 기능하는 인간으로서
나를 저울에 올려놓는 판단의 언어였다.
이것은 나만의 느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만 최선을 들여다보니 그것은 시계추가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기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선을 다해 놀다가 성적을 놓쳤고,
최선을 다해 공부하다 친구들과의 추억을 놓쳤다.
최선을 다해 일하다 가족과의 추억을 만들지 못했고,
가족과의 추억에만 최선을 다할 때는 동료들 모임에 소원해졌다.
나에게 최선은 추와 같았다.
너무 한쪽으로 기울면 흔들림이 심해졌다고 나의 산책 시간을 비집고 어쭙잖은 생각들이 들어온다.
그만하면 됐다.
쉬엄쉬엄 살라고 그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다.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나쁘지 않지만 오늘의 여유로움도 중요하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인생은 계획과 노력 못지않게 삶의 우연이 즐비하며 중요하며 또 시도 때도 예측할 수 없게 들어온다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오늘의 우연을 담는 그릇이 되라고 말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중년이 되고 보니 삶은 우연을 살아내는 과정이었다.
어쩌면 내게는 이런 말이 더 힘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할 만큼만 해라. 하고 안 되면 다른 것에 눈을 돌려도 좋다. 우연을 가꿔라”
계획에 골몰하기보다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며
불쑥 내게로 들어오는 우연을 반갑게 맞이하고 손잡는,
우연에 나를 맡기는 중년 길을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