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솔직해질 수 있나?

아니 에르노 <젊은 남자>

by 사각사각

도서관에 가서 아니 에르노 님의 책이 쪼르륵 꽂힌 서가를 발견해서 기뻤다. 그중에서도 가장 짧은 단편인 것 같은 <젊은 남자>라는 책을 읽었다. 제목 그대로 젊은 남자와 만났던 경험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소설이다.

쉰 네 살에 무려 서른 살 차이가 나는 남자와 사귄 이야기다. 뜨아, 서른 살 차이라니. 역시나 스케일이 남다르시다. 이 분은 이혼을 하셨는데 아마도 그 후에 만났던 남자들에 대해서 쓰신 것 같다.


소설인데 에세이 같기도 하고 ‘난 경험하지 않은 일은 쓰지 않는다.’ 이렇게 선언하고 쓰시는 데 너무나 솔직해서 놀랍다. 1940년 생으로 지금은 팔순이 넘으셨다. 난 비슷한 소설을 쓰더라도 '이건 경험에 허구적인 상상력이 더해진 것이다' 라고 주장해야지 사생활에 대한 타인의 호기심을 감당 못하겠다. 주목을 받는 것 자체가 어렵겠지만.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나? 오호, 설마 실험정신을 가지고 소설을 쓰기 위해 다양한 유형을 만나보시는 건가?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이 대학생 청년의 경우에는 아마 독자로서 이 분의 글에 반해서 한번 만나달라고 편지를 보냈던 것 같다. 그래서 호의로 조언을 해 주고자 만났다가 연인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인상적인 구절을 몇몇 받아 적어봤다.


p20 쉰네 살인 내게, 그는 내가 단 한 번도 연인에게 받아본 적 없는 정열을 바쳤다


음, 이 대목에서 살짝 부럽기도 하고. 이건 사실 실행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마음인 것 같다.

원래 이십 대에는 누구라도 물불 안 가리고 정열을 바치지 않나. 쉰 네 살에 그 정열을 받아준 게 더 대단하다.

p24 내가 더 이상 그와 같은 세계에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예전에 남편과 있으면서 나는 서민의 딸이라 생각했는데, 그와 있으면서 나는 부르주아가 되었다.


연인으로서 사귀고 함께 시간을 공유하긴 했는데 같은 세계에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점이 공감됐다. 동시대에 살고는 있으나 세대차가 많이 나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작가는 이제 대학생보다는 경제력이 있으니 부르주아가 된 것으로 느낀다. 경제력 차이에서도 부딪치고 아무래도 '돈 잘 쓰는 (늙었지만) 예쁜 누나’가 될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p24~25 나는 다시 열 살, 열다섯 살이 되었고, 또다시 내 가족과 사촌들과 한 식탁에 있었다. 그 안에서 그는 하얀 피부에 노르망디 사람답게 볼이 빨갰다. 그는 뒤섞인 과거였다.


그와 함께 나는 삶의 모든 나이를, 내 삶을 두루 돌아다녔다.


멋진 표현인 것 같다. 젊은 남자를 만나면서 그녀는 그를 통해서 어린 시절에 비슷한 환경에 놓여있었던 자기 자신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향수를 느끼는 동시에 붙잡을 수 없는 지난 과거처럼 현재에는 걸맞지 않은 관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씁쓸하다.


p26 내 젊은 시절이라는 연극을, 혹은 정성스럽게 일화들을 만들며 소설을 쓰는 느낌, 혹은 그 소설을 체험하는 느낌이었다.


실제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상대방을 보면서, 이십 대 지난 시절의 과거가 문득문득 기억나고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느낌이 아닐까? 실제 만나봐야 이렇게 생생하게 쓸 수 있으려나. 그럼 어디 한번 도전!


p31 어쨌든 나는 중년 커플을 바라보면서, 내가 스물다섯의 젊은 남자와 있는 이유는 내 또래 남자의 주름진 얼굴, 나 자신의 늙은 얼굴을 내내 앞에 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A의 얼굴 앞에서는 내 얼굴도 그처럼 젊었다.


작가는 젊은 연인과 함께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의 의혹과 비난 섞인 시선을 느낀다. 젊음이란 참 빛나고 오래도록 두고 보고 싶은 찰나이다. 남녀 불문하고 누구나 젊음에는 끌린다. 다만 정신줄을 붙들고 자제할 뿐이지.

p44 20세기 마지막 가을이었다. 나는 세 번째 밀레니엄 속으로 홀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어 행복한 나를 발견했다.


결국에는 이별이었지만 희망적으로 끝맺는다. 이 소설은 44페이지 정도밖에 안 되어 짧고 강렬하게 마무리된다. 언젠가는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한 시간 정도면 처음부터 끝까지 휘리릭 다 읽을 수 있으니.


한 여름밤의 꿈같은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봤다. 감히 넘볼 수 없는 대범한 연애이긴 하나 위 문장들에 깊이 공감하면서 나이 들어감에 관한 깊은 성찰이 담겼다고 본다. 그래도 서른 살 차이는 안돼!

난 옥수수나 먹으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