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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사각 Jun 04. 2021

죽음에 관심이 있는 이유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

서점에 가서 책을 한 권 샀다. 성격대로 몇 권의 책을 잠깐 둘러보고 단숨에 마음에 드는 책을 골랐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김범석 저). 말기 암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분이 환자들의 죽음을 대하는 각각의 자세를 보면서 쓴 에세이였다. 죽음에 대한 글에 평소 관심이 있는 편이다. 딱히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는 아니다. 죽음을 진지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남아 있는 삶을 더 잘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죽음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다. 죽음의 문턱까지는 갈 수 있어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은 여간해서는 힘든 일이다. 아직까지 살면서 나 자신의 죽음의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다만 주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보았을 뿐이다.


아버지는 집에서 돌아가셨다. 그 전에 아버지는 심부전증으로 여러 번 응급실에 실려 갔었다. 몇 번의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고 년에 일을 놓고 다른 취미를 찾지 못한 것 같았던 아버지는 죽기를 고대했었던 것 같다. 날마다 술을 마셨고 병원에도 더 이상 가지 않으셨다. 어느 봄날 오후 였던가 방에 홀로 계신 아버지의 죽음을 발견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망연자실했다. 아버지는 잠을 자는 듯 보였을 뿐 약간 밖으로 나온 혀와 풀어진 허리춤과 코를 스쳤던 소변 냄새 외에는 다른 점이 없었다. 경찰이 집에 왔었고 어수선한 집 안 때문에 무척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경찰들은 혹시라도 모를 타살의 흔적을 찾았으나 충격을 받은 우리를 보고는 몇 마디 날카로운 추궁을 하다가 이내 상황을 수긍하고 해야할 일을 알려주고 조용히 돌아갔다. 정신없이 장례식이 치러졌고 의식적으로 아버지는 영영 우리 기억밖으로 사라져 갔다.


아버지는 왜 이런 죽음을 맞이했을까? 이렇다 할 유언이나 마지막 사랑의 표현조차 한마디 하지 않고 죽음을 준비할 시간조차 없이, 없이 쓸쓸히, 우리 모두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말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다시 찾아가는 데는 십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아버지의 마지막은 까맣게 잊고 싶은 슬픈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허탈한 죽음은 우리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서 사망확인서를 받아야 했고 장례식장을 예약해야 했고 친지들에게 급히 연락을 하고 장례방식까지 하루 이틀 만에 다 결정해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이 어떻게 순식간에 지나갔는지 기억에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관이 화장장 안으로 들어가고 가족과 친지들의 가슴을 찢는 통곡이 이어지는 뼈아픈 순간만이 남았을 뿐이다.



인간이 자기 죽음의 날을 미리 알 수 있는 경우도 희박하기는 하다. 하지만 적어도 가까운 가족들에게는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은 복이라고 생각된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황망한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시간의 여유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사고로 인한 것이 아니고 지병으로 인한 죽음이라면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어느 정도는 예견할 수 있다고 본다. 아버지는 왜 홀로 고독하게 죽는 것을 선택하였고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을까? 우리 모두는 그 집이라는 한 공간 안에 있었고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고 마지막으로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만큼의 애정은 남아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삶을 포기하고 무너진 아버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애끓게 사랑한 것은 아니었고 원망의 마음과 마음을 짓누르는 걱정도 있었으나 적어도 죽음의 순간을 차갑게 무시할 만큼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이 사회에서 대단한 위치에 있다 해도 쉽게 잊혀 지기 마련이다. 인간이란 부정적인 정서를 오래도록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이 더욱이 살아 있는 인간이 극도로 기피하는 죽음이라면 빨리 놓아버리고 삶의 환희로 돌아오고 싶어지는 단어일 뿐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이라고 해도 적어도 그 가족들에게는 지울 수가 없는 일이다. 나를 이 세상에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인데 그 죽음의 순간을 직접 목도하고 편안하게 보내드리고 싶지 않은 자식이 있을까?


그럼에도 마침내 아버지를 용서하였다. 문득 깊이 무의식에 묻어 두었던 괴로운 기억이 떠오르기는 했으나 아버지의 죽음의 애통하고 안타까운 순간들은 몇몇 장면 외에는 보이지 않을만큼 희미해졌다. 지상에 남아있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연민과 사랑뿐이다. 아버지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느 인간인들 그 사람이 되어 보지 않고서야 완벽하게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떠나서 아버지는 평생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성실하고 꾸준하게 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신 분이다. 다만 마지막 생에서 죽음과도 같은 암담한 우울의 늪에 빠져버렸고 잠시 정신을 놓고 가족들을 염려하게 한 것뿐이다. 그 엄중죽음의 원인과 사실은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마음에 아프도록 새겨두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삶처럼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 어느 때보다도 삶을 생생하게 느끼고 주변의 사람들을 축복하고 가볍게 내 본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 남길 수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더라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랑의 마음을 담아 한명 한명에게 고루 남겨 주리라. 그들의 마음속에 슬프고도 행복했던 모든 시절에 더없이 따뜻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그렇게 환자들은 때로는 살아서 때로는 죽어서 나를 떠나지만 나는 여전히 여기에 남아서 그들이 남긴 흔적들을 되짚으며 그 의미를 되새기곤 했다. 그래서 때때로 ‘죽음’이라 쓰고 ‘삶’이라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을 잊어가는 나에게 누군가는 계속 의미를 물어왔으므로 (‘어떤 죽음이 나에게 말했다’, 7쪽)

꽃과 같이 아름다웠던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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