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온 날이었다.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열고 들어 온 순간 더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아담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오롯이 기다리고 있던 방.
이사로 인해 분주하고 격양된마음을 토닥여주는 광경이었다. "안녕 어서와. 우리 이제 함께 잘지내." 라고 말없이 따뜻한 눈인사를 건네는 것 같다.
이사의 과정은 녹록치가 않았다. '대체 이 한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이 이다지도 많아야만 하는 건가?' 이사짐을 힘겹게 나르며 끝없이 되묻게 된다.
종량제 봉투에 바리바리 무심하게 넣어온 물건들의 소재는 불분명하다.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열어보고 찾으려면 앞으로도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낯선 집의 구석구석을 돌아본다. 화장실에는 휴지와 비누와 락스 등등 오랫동안 지켜온 자리인 듯 작은 소품들이 단정하게 놓였다. 심지어 새 것같은 상큼한 색깔의 화장실용 녹색 슬리퍼도 하나 있다. 이게 웬 횡재냐? 곰팡이가 달라붙어서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던 내 핑크빛 슬리퍼를 미련없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부엌으로 가보니 조금씩 남아 있지만 식용유와 주방 세제와 1리터 음식물 쓰레기 봉투가 몇 장 가지런하게 올려져 있았다. 얼마 남지는 않았어도 마치 펜션에 놀러 갔을 때 손님을 위한 간단한 양념 재료 같은 것들이 준비되어 있는 것 같이얌전하게 놓여있다.
이 집에 살던 이전 세입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 전해듣기만 했지만 이 분은 무척 단정하고 세심한 분일 것이다. 정성을 다해 직접 청소를 깔끔하게 하고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까지 반듯하게 남겨 두었다. "자, 이곳에서 새롭게 행복한 삶을 사시길 바래요." 라고 나직하게 전하는 것처럼.
아, 짐싸기에 바쁘고 고됐던 나머지 이전 집의 청소를 다하지 못하고 나온 것이 아쉽다. 대신 입주 청소비를 냈으니 됐다고 자위했지만 다소 낯 뜨겁고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게다가 물건이라고는 덩그러니 놓인 비누 한 조각 외에는 싹 쓸어 가지고 왔는데.
우리가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친절은 그리 대단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조금씩 남아있는 소소한 물건들에서 그 다정한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부디, 이름 모를 세입자분이여, 어디에서 사시든지 행복하소서. 저도 이 집과 정을 붙여 잘 살아보겠습니다.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