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09
얼마 전에 봄을 맞이하여 신나게 책장 정리를 하다가, 중학생 때부터 써오던, 또 대학생 때도 써내려 가던 일기장과 메모장 뭉치들을 발견했다. 내가 나를 응원해주기 위해 써 내려간 다짐의 말들부터, 좋아하는 누군가 때문에 혼란스러운 마음들, 잘 되지 않는 일에 도전하면서 힘겹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은 오기들까지 잔뜩 적혀 있는 기록 뭉텅이들이었다.
지금의 나는 지나온 시간들이 있기에 존재하는 거겠지만, 이런 기록들이 없었다면 과연 나 자신을 돌아볼 때 이정표가 있었을까 싶었다. 또 그때의 기록들을 읽으면서,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귀엽게 느껴지면서도, 지금의 나는 당시의 어린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소중한 경험들을 잔뜩 지니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했다. (따라서 혹여 지금의 삶에 힘겨워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무한 귀여움과 긍정을 발산하던 어린 시절, 스스로의 기록들을 찾아보라고 부추겨 주고 싶다.)
그래서 일주일에 글 한 편 쓰기 미션에서 도무지 이번 주는 주제를 못 찾겠다고 고민하다가 오늘은 떠올리게 된 이 '기록'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볼까 한다. 역시 앞으로도 기록을 멈추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도 잔뜩 담으면서 말이다.
기록은 참 보배 같은 존재다. 다음과 같은 장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장점이다. 기록이 없었다면, 간절히 원하던 시험에 떨어진 어느 날의 실망스러웠던 마음과 그 마음으로부터 나를 끌어올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던 나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엄마와 싸우고 집을 나갈 거라고 그렇게 다짐해서 엄마를 뿌리치고 혼자 울면서 걸어가고, 엄마는 차를 타고 나를 좇아 오던 웃지 못할 날의 기억도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 같은 날, 그래도 나는 집이 좋다고 항복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더 어린 시절, 천둥 번개가 많이 치던 어느 밤, 동생들과 집의 불을 다 끄고 베란다에 나가 의자들을 세워두고, 번개 쇼를 구경하던 때를 기억할 수 있었을까? 티벳 여행 그 밤열차 칸의 야경과 친구들과 떠들며 설렜던 분위기를 어떻게 다시 느낄 수 있었을까? 기타 등등..
당시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라 그저 그렇게 흘려보냈던 일상들이 기록 덕분에 추억이 되었다. 또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다 보니, 기록에 따른 기억들도 마음 가득 올라왔다. 글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머릿속에는 또렷이 새겨져 있는 순간들, 순간 속의 향기들, 분위기, 웃음소리들까지. 내가 어쩌다가 지금의 나로 흘러 왔는지, 또 흘러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알고 보니 나는 힘을 또 내고 내어서 지금의 나로 자랐구나라는 대견함까지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서 기록이 참 소중했다.
예전의 기억들을 남아 있게 해주는 게 기록이라면, 지금의 기억들도 남아 있게 해주는 것 역시 기록이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특히 내가 배운 새로운 사실들은 무엇인지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잊지 않을 수 있다.
나는 회사에서 새로 받은 업무나 업무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들을 노션(Notion)이라는 앱에 기록해두는데, 내가 읽은 것들을 나만의 말들로 정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요즘은 업무가 바빠서 회사에 입사했던 초반에 비해 따로 기록하는 시간들이 많지 않아 아쉽지만, 한창 디지털 마케팅의 주요한 단어들의 정의와 관계를 공부하던 날들에는 '마케팅 공부' 폴더를 채우는 재미가 좋았다. (생각 난 김에 적어두는데, 이번 주말에는 시간을 잡고 앉아서 그간 내가 배운 디지털 마케팅에 대한 작은 인사이트를 풀어보면 좋을 것 같다.)
뿐만 아니다. 읽고 싶었던 것들로도 기록은 돌아가게 해 준다. 나는 주로 지금 당장은 바빠서 읽지 못하는 글들이지만 쓱 봤을 때 매력적인 글들을 포켓(Pocket)이라는 앱에 스크랩해 두거나, 페이스 북 글들 중에는 링크 저장을 해두었다가 몰아서 읽는데, 이런 스크랩의 기능들도 기록으로 칠 수 있다. 이런 기록들은 내가 좋아하는 글들이 나와 가까이에 머물게 해 주고, 내 잡다한 정보의 원천으로 귀하게 남아 있어 준다. 또 언제든 돌아가 들여다볼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어, 공부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복습'을 위한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또 내 기록만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남의 기록'들도 나를 이 지구 어디로도 여행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한창 구글링에 재미를 붙였을 때에는 구글링 해서 나오는 글들의 2, 3페이지까지 다 클릭해가면서 읽을 때가 있었다. 또 영어로 검색할 때는 한글로 검색할 때와 또 다른 느낌의 글들을 만나게 되어서 좋기도 한데, 그때 새삼 즐겁고 신났던 것은, 클릭 한 번으로 세상 온갖 군데를 다 돌아다닐 수 있구나를 깨달았을 때였다.
또한 단편의 글들 뿐만이 아니다.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 중 하나인 '책'은 구전되지 않던 것들을 길이 남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남은 것들은 우리를 시공간을 초월해 여행하게 해 준다. 기록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2, 3000년 전의 로마로 여행할 수 있었을까? 내가 어떻게 싯다르타를, 그리스인 조르바를, 반 고흐를 만나며 그들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었을까? 기록이 없었더라면, 나는 책 속을 여행하며, 뉴요커의 삶을 살아보지도, 누군가를 대신해 마음이 미어지는 절절한 짝사랑을 해보지도, 머릿 털이 쭈뼛 서도록 스릴 넘치는 상상의 세계로 뛰어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시 '나의 기록'으로 돌아오자면, '일기, ' 곧 나의 일상을 적어 내려 가는 기록 또한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 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글들, 영상들을 보면서 깨달을 때가 있는데, 예전에 본 좋은 테드 영상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소개한 적이 있었다. 자잘하고 당연한 것 같아 보이는 방법들이 몇 개 지나가자, 가장 마지막으로 제시한 방법 하나가 남았고, 그 마지막 방법은 마지막인 만큼 강렬했다. 바로 '나의 삶에 내가 스토리를 입히는 방법'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스토리 텔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떠들기 좋아하고, 표현하기 좋아하는데, (오죽하면 몸짓과 손짓, 음악 등으로도 나의 감정과 생각들을 표현할까) 테드 영상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삶을 스토리로 표현해 내면 더 행복하게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스토리로 표현해 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일기를 쓰는 것이다. 일기를 통해 나에게 우연히 닥친 일들을 연속된 에피소드로 풀어내면서, 또 그날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면서 사람은 치유를 얻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고,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게 되며, 결국은 더 행복해지게 되는 것 같다.
정말 마지막. 기록의 마지막 힘이다. 이 글을 빌어 '브런치 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나에게 기록은 '꿈에 다가가는 한 걸음'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등단을 하려면 엄청난 체력과 지력, 엉덩이 붙임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아 버린 나는, 일찌감치 젊을 때는 기록은 잠시 미뤄두고 현실 세계부터 즐기자고 판단했던 때도 있다. 그에 따라 바깥세상에 호기심을 두고 돌아다니기 바빴고, 꿈은 작가라고 하면서 매일매일 글쓰기가 힘겨울 때도 있었다. 그런데 브런치는 그런 게으르고 정신 산만한 나에게 '작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물론 아직 진짜 작가가 되려면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먼 길이 펼쳐질 거라는 생각도 참 좋다.)
그리고 브런치에 남기는 글들은, 또 브런치 외에도 내가 여기저기 다양한 곳에 남기는 글들은 결국은 미래의 어느 날 내가 정말 '작가'가 될 수 있게 해 주리라 믿는다. 결국 나에게 기록은 이렇게 꿈에 다가가게 해주는 무지개다리다.
시간이 많이 들 때도 있지만 이러나저러나 나는 기록이 참 좋다. 그래서 흘러가는 생각을 붙잡아 두기 위해 가방에 손바닥만 한 메모장과 펜을 늘 넣어 다니는데, 불현듯 무언가를 기록할 미래의 언젠가를 위한 나만의 준비다. 또 나의 지갑 안에는 살면서 이루고 싶은 꿈 목록도 작게 들어가 있는데, 이것도 다 기록을 해둔 덕분이지 아니면 바쁜 일상 속에 잊어버리고 살 때가 더 많을 것이다.
결국, 기록은 참 많은 걸 하게 해 준다. 참 고마운 존재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일도 기록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