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07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부끄러운 나의 과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부끄럽지만 사실 어쩔 수 없었던 것 같기도 한 나의 과거는 나는 무엇이든 혼자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동생들이 있다보니, 엄마가 자연스레 손이 더 많이 가는 것은 동생들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내 할 일은 내가 척척 해내는 것이 더 많은 칭찬을 받기에는 손쉬운 길이었다. 그래서 그 해내자!는 내 사명이었고, 특히나 혼자서 해내고 칭찬받을 때의 짜릿함이 굉장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모여서 습관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최근까지도 협조적이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으로 혼자 힘으로 해내려고 한 경우가 많았던-그래서 어쩌면 칭찬은 내가 다 받으려고 했던 마음도 있었던-욕심쟁이이기도 했던 것 같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는 아마 많은 첫째들, 혹은 독립적인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첫째로 태어나 남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해내면서 성장하기는 생각보다 편리하다. 게다가 그게 자기 발전과 연관된다면 더더욱 그렇고, 한국의 교육 현실 속에서 온전히 자라났다면 익숙한 풍경이다. 우리는 내가 1등이 올라가면 누군가는 1등에서 밀려나고, 누군가가 1등이 올라가면 내가 1등이 떨어지는 상대 평가에 익숙했었고, 그에 따라 나눠주는 건 어쩌면 인색해질 때가 있었다.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나눠주는 것이 때로는 지는 느낌이 들게도 했으니까. 그리고 시험 볼 때의 1인 1개 가림판의 존재는 그런 느낌을 정당화 해줬다. 나는 누군가의 도움도 받지 않으면서, 제대로 하고 있는 중이야..!라는 그 때는 대견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부끄러운 생각도 했었고.
그런데 그렇게 줄세우기를 했던 고등학교까지의 세월이 끝나고, 대학교에 들어오고 나서는 참 많은 게 변했다. 처음에는 함께 하기 싫더라도 그룹이 되어 팀 프로젝트를 하면서는 옆 친구와 알아가게 되고, 힘을 합쳐 하나의 완성물을 만들어 뿌듯해 하고 그러다 연이 닿으면 친구가 되고.. 교환학생에 가서도 생김새가 전혀 다른 친구들과 친해지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친구를 사귈 때 같은 느낌을 생경하게 새로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친구가 되기 위해 스스럼 없이 먼저 내가 가진 과자를 나눠주면서 인사를 하고 이름을 이야기 하며 안부를 나누고, 약속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스치는 인연을 붙잡아 내 인연으로 만들고.. 등등. 그렇게 나는 다양한 친구들과 교류를 나누는 기쁨에 빠져 나름 '핵인싸'가 되었었다.(그에 따른 학점은.. 암전..그리고 지금은 조용히 회사 다니느라 핵아싸..ㅎㅎ)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기쁨은 나에게 최고의 기쁨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목표를 설정하고, 공부를 하는 것들에 있어서는 혼자가 편했다.
하지만 최근에 친한 언니가 추천해준 '함께 자라기'라는 책을 읽으면서 주마등처럼 머릿 속에 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무한 별표를 쳤던 이 부분이다.
소프트웨어 공학의 연구에 따르면 뛰어난 개발 전문가들은 사회 자본(social capital), 즉 인맥이 훌륭합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도 있었죠. "업무적으로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이 도와주는 사람은 누구이고, 또 당신이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연구에 따르면 업무 성과가 탁월한 개발자들은 이 질문에 답을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입사한 지 1년도 안 되는 친구가 이렇게 답하더군요. "아직 1년도 되지 않아서 책 보고 코드 보고 업무를 배워가는 중입니다. 그래서 딱히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고 또 아직 업무 파악이 안 된지라 누굴 도와주거나 할 입장도 아닙니다" 뭐 나름 이해가 된다 싶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다음으로 인터뷰한 사람도 역시 입사한 지 1년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놀라운 부분은 답변의 앞부분은 같은데 뒤가 정반대였다는 점입니다. 그 친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직 1년도 되지 않아서 많이 물어보며 배우고 있습니다. A 선임, B 책임, ... 그리고 제가 공부하고 싶은 내용을 주제로 팀 내 스터디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같이 공부해 가는 거지요. 제가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많이 봤던 모 프레임워크와 관련된 문제로 다른 팀원이 어려워하는 걸 우연찮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와드렸죠. 아직 1년도 안 되어서 시간이 있으니까 적극적으로 다른 분들 일을 도와드리려고 나서고 있습니다. A선임, B책임,...
두 사람의 답은 모두 '아직 입사한 지 1년도 되지 않아서'로 시작했습니다만 그 뒤 '자신의 선택과 행동, 반응'은 180도 달랐습니다. 제가 누구에게서 더 높은 잠재성을 봤을까요?
혼자는 편하다. 편하고 빠르다. 최근에 회사 방향을 또 틀어보기로 결심하면서 이번에도 혼자의 빠른 길을 택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나처럼 뒷심이 약하고, GRIT과는 때로 거리가 있는 사람도 그동안 더 많은 걸 해낼 수 있었던 때들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오래 무언가를 지속하는 것에는 약하지만, 팀 프로젝트 같이 함께 무언가를 공동으로 창작하는 일에는 강하고, 또 그것들을 즐긴다. 대학 때는 생각보다 혼자 하는 과제보다, 힘들더라도 함께하는 팀 프로젝트들을 즐겼기에 팀 프로젝트가 있는 과목도 즐거이 골라 담았던 이상한(?) 취미가 있었다. 또 지금까지 비저너리도 흔들흔들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나조차도 휴식기를 겪은 후로 각자의 삶에 좀더 충실하며 느슨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최근 1년 반을 돌아보면 비저너리 브런치 도합 공유 수 1000회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로든 함께 가주는 동료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그리고 디자인 분야를 배우게 되면서 '협력'을 기본적인 자세로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멋쟁이 사자처럼'에서 친구들과는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그 점이 연결 시켜준 다음의 원티드 UX 디자인 실전 강의에서는 함께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의견을 나누어 가며 조율하며 함께 창작하는 것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고, 작년 말에는 지금 돌아보면 참 감사했던 공통의 목표를 향해 가던 스터디 덕분에 나름 달력도 완성했고, 연초에 브라바 디바 프로젝트도 마무리했다. 최근에는 친한 오빠가 알려준 해외 취업용 이력서 스터디에서 미리 해외 취업을 위한 준비를 서로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가며 진행하는 것이 뜻깊고 감사했다. 또 강연을 들으러 친구들과 함께 다니면서 서로 배운 점을 나누고, 글쓰기 모임에서는 힘겹지만 한 주에 한 편씩 글을 쓰려고 독려해주시는 분들과 덧글을 나누며 기운을 얻고 감사함을 느끼고, 친한 언니와는 '한 달, 보다 보람차게 지내기 프로젝트'(내가 멋대로 이름 지었어 언니!ㅋㅋㅋ)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것도 왠지 오래갈 것 같아 참 뿌듯하다.
그렇게 나는 앞으로 혼자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우리'의 기회를 찾아 헤매려 한다. 혼자는 '우리'가 되니까. 그리고 '우리'는 더 멀리 가고, 오래 가고, 함께 가니까.